교육학 김일성의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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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교육학 김일성의 리더십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김일성의 리더십
1.인물 선택 : 김일성의 리더십
2.독서자료 &참고자료 ①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서대숙 지음
②김일성 리더십 연구. 이태섭 지음
③김일성과 만주 항일전쟁. 와다 하루끼
④현대 북한의 지도자-김일성과 김정일. 서대숙
⑤www.mnd.go.kr 6.25 전쟁 50주년 기념사업단
3.포함내용 : 1.성장과정의 배경 및 김일성에 대한 역사.
(개요) ㉠가족과 초기시절의 모습
㉡항일 항쟁의 업적
㉢해방 후 정치권력의 강화
㉣김일성의 공산주의 독자성 추구
㉤김일성의 통치 및 후계자 김정일
2.김일성의 정치사상
㉠주체사상
㉡주체사상의 발전
3.김일성의 리더십에 대한 본론
㉠김일성의 카리스마적 리더십
㉡김일성의 당권 장악
㉢김일성의 정권기관 장악
㉣1950년대 위기의 시대 극복
㉤격동의 1962년대 후반
㉥신적 존재로서 현실을 이끈 지도자
4.김일성에 대한 평가
1.김일성의 성장과 배경 및 김일성에 대한 역사
㉠가족과 초기시절 모습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 평양 서남 근방 대동강 기슭의 만경대에서 출생 하였다. 부친 김형직과 모친 강반석이 낳은 3형제의 맏이로 본명은 김성주이고 그의 두 동생은 김철주, 김영주 라고 하였다. 김일성이 이곳에서 출생한 연유는 소작인이었던 조부 김응우가 이씨 선대묘의 묘지기로 고용되어 거기서 살았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본관이 전라북도 전주인데 그의 12대 조상이 평양으로 이주 했다고 한다.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은 1926년 32세에 요절하고 그리고 어머니 또한 그가 죽은지 6년 만에 40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게 되는데 이때 김일성의 나이는 20세였다. 그 후로부터 김일성은 부모의 기독교 때문에 손정도 목사와 함께 생활하게 된다. 김일성의 교육은 만주와 한반도를 드나들면서 소학교를 세 번이나 옮겨 다녔는데 처음에는 만주 바다오거우 에서 다음에는 평양의 창덕 그리고 다시 만주에 돌아와서 무쑹 소학교를 졸업. 그의 정규교육은 조선 독립 운동가들이 세운 만주 화전현 화성의숙을 거쳐 지린의 중국인 학교 위원중학 2학년으로 끝나게 된다. 그는 ‘타도 제국주의 동맹’이라는 항일 단체와 지리에 있었던 조선 공산당 산하의 만주총국에 중학생 신분으로 참가, 1929년 5월에 체포되어 17세의 나이로 옥살이를 경험하게 되었고 출소 뒤 김일성은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고 항일운동에 동참한다. 이때 이름도 김성주에서 김일성으로 개명하게 된다.
㉡항일전쟁의 업적
감옥에서 나온 김일성은 이런저런 항일단체에 관여하고 이러한 항일 운동은 일본의 조선합병, 만주국 수립 그리고 중국 본토로 뻗치는 제국주의적 침략에 반기를 들고 조선 독립과 중국에서의 일본군 축출을 목표로 결집된 투쟁 대열에 참가 하였다. 김일성의 항일운동은 한마디로 평가 받을 만한 것이었는데 북한에서는 지도자 김일성의 항일운동을 중심으로 북한의 혁명전통을 말하고 그의 빨치산 투쟁만이 민족적 독립 운동이었다고 가르친다. 김일성은 정치적 수완도 있었지만 주어진 기회와 조건을 잘 이용해서 북한의 지도자가 된 사람이다. 그가 만주에서 동북항일연군의 일원으로 중국인들과 함께 투쟁한 것이나 연해주로 쫓겨나서 소련군의 훈련을 받은 것은 해방된 한반도에 돌아와서 북쪽의 정치 지도자로 입신 하는데 아주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 과거 수 십년 동안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항일 투쟁 경력을 조작해서 그를 조선 혁명의 유일무이한 지도자로 추켜세우고 조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상 으로 제시 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해왔다. 이러한 작업은 김일성의 항일 투쟁을 ‘혁명신화’로 둔갑 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반대로 남한에서는 그의 투쟁역사를 허위적인 혁명 신화로 몰아서 완전히 무시해 왔다. 이러한 양극단 행위는 한반도의 분단이 가져온 비극이며 김일성의 항일운동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장애가 되고 있다. 김일성의 항일운동사는 혁명 신화가 아니다.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끝까지 잘 싸웠던 실제의 인물이다.
㉢해방 후 정치권력의 강화
해방이 되자 평양출신인 김일성은 자연히 북한으로 돌아왔다. 그는 해방 후 한 달 남짓 경과한 9월 19일, 하바로프스크 88여단의 빨치산 동지들과 함께 원산에 입항했다. 김일성이 만주와 연해주에서 한결같이 항일 투쟁에 헌신했으나 중국 공산당이 지도하는 동북항일연군과 소련군에서 활동했던 탓으로 국내에는 크게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북한에 들어온 소련군은 88여단에서 4년간 그들의 훈련을 받은 김일성을 지도자로 내세워 점령 정책을 이행하려고 하였다. 소련이 모든 조선의 혁명가들과 독립투사들 가운데서 왜 김일성을 선택 했는가에 대해서는 지금껏 이론이 분분하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소련이 잘 알고 있는 조선의 지도자가 없었다는데 있다. 1930년대부터 1940년대 초에 이르기 까지 조선 공산당과 소련 공산당 사이에 관계가 단절 되었고 1930년대에 코민테른과 연계를 맺었던 조선 사람들도 스탈린에게 숙청 되었거나 소련으로 귀화 하였다. 다시 말해서1945년 8월 조선이 해방 되었을 때 스탈린이나 소련 공산당에 조선 공산당의 지도자로 알려진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이후 그는 만주에서 일본 군경에 맞서 싸울 때 중국인들의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소련국의 지지를 등에 업고 정치적 지도력을 발휘 할 수 있었는데 항일 무장투쟁이 과거 경력의 전부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김일성이 북한에 들어와 실시한 정책들은 자신의 구상이 아니라 소련 군정의 제시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그는 토지개혁, 산업 국유화, 남녀 평등법, 노동법, 농업 현물세, 선거법등 일련의 민주개혁은 소련이 점령한 동유럽에서 실시한 정책들이었고 김일성은 스탈린을 ‘조선의 대부’라고 부르면서 소련 군정의 결정을 아주 충실하게 집행하였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와 지위를 굳혀가기 시작 하였다.
㉣김일성의 공산주의 독자성 추구
1950년대에 여러 경쟁 세력들의 도전에 대응해 나가는 과정에서 김일성은 주로 자기의 빨치산 동료들의 지지에 의존했으나 인민들의 지지를 얻는 데에도 실패하지 않았다. 그는 노동자들을 동원하기 위해 수많은 방법을 고안했으며 메달이나 특별 호칭으로 그들의 노력을 인정해주고, 서로 경쟁하여 당이 설정한 목표량을 초과달성 하라고 독려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인민들에게 물질적 보상을 기대해서가 아니라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 열심히 일하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조선의 공산주의자’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 하였는데 그가 말하는 ‘새로운 조선의 공산주의자’란 자기의 빨치산 전통으로 무장하고 개인주의나 이기심과 투쟁해야 하며 사회주의적 애국주의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정신을 배우고 노동을 중시하며 계속적으로 혁신적이고 혁명적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당과 국가에 충성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것이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과는 다른 북한 김일성 공산주의의 독자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1961년 9월에 조선 노동당 제 4차 대회가 개최 되었을 때에 김일성은 실제로 경제적 조건을 개선시키려는 자기의 계획을 시행할 만한 위치에 있었고 그는 도전자들을 제치고 승리 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기에게 충성을 바쳐왔던 빨치산들의 대부분에게 당의 요직을 맡겼다. 김일성은 제 4차 당대회에서 절대 권력을 수립하는 데에 성공 하였고 북한에는 소련 점령군도 중국 점령군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김일성에게 있어서 4차 당대회가 갖는 의미는 빨치산 동료들이 김일성의 유격대 경력을 한국(조선) 혁명운동의 진정한 역사요, 한국(조선)의 독자성 확립의 진정한 기반이라고 부각시키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였다. 또한 1960년대에 들어와서 그는 중-소 분쟁이 고조되는 와중에 있었다. 중-소분쟁이 계속되는 동안에 김일성은 내내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했으나 중국과 소련 모두와 국경을 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체제의 수립과 유지에 양국이 모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엄격하게 중립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사회주의 진영의 단결이라는 명분아래에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연대성만을 공허하게 주장했을 뿐이다. 북한의 자주성을 확립하려고 노력하면서 김일성은 분쟁에 직접 개입되지 않으려고 조심하였고 북한은 소련과의 논쟁에서도 한국사에 대한 해석이나 아시아 경제에 관한 학술회의의 평양 개최 등과 같이 정치적으로 민감하지 않고 학술적으로 안전한 주제들을 선택 하였다. 김일성은 이제 분열된 공산주의 세계를 넘어 국제적 접촉의 범위를 확대 시켜야만 했는데 중-소분쟁이 격화되던 1960년대에 그는 제 3의 세계에서 우호국들과 동맹국을 찾기 시작한다.
㉤김일성의 통치 및 후계자 김정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