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이백의 월하독주 장진주 몽유천노음도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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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이백


1. 당대의 사회와 문화
수나라에 이은 중국의 왕조인 당나라는 태종의 즉위 후 최대의 외적이던 돌궐을 평정하였으며, 주변의 여러 나라를 조공 체계 안에 편입시켜 국위를 신장하여 한나라를 능가하는 대제국이 되었다. 태종은 내치에도 힘써 치세 20여 년은 ‘정관(貞觀)의 치(治)’라고 하는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태종의 뒤를 이은 고종이 말년에 황후를 폐하고 태종의 궁인이었던 무씨를 황후로 세움으로써 이른바 여화의 길을 열게 되었다. 무후는 고종에 이어 즉위한 자기 아들인 중종과 예종을 폐하고 즉위하여 국호를 주로 개칭하였으며,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제로서, 재위 16년간 잔혹한 탄압의 공포정치를 시행한다. 그러나 쿠데타로 황제에 복위한 중종은 국호를 당으로 복구시키게 된다. 하지만 황후 위씨 또한 실권을 쥐고 중종을 독살한 후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위씨 일파를 척결하고 예종을 복위시켜 당조를 정상 궤도에 올려놓은 자가 바로 현종이다. 그는 정치를 쇄신하고 사회 안정에 힘써서 정관의 치세에 비길 만한 개원(開元)의 치세를 열어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제 분야에서 당의 최성기를 이루었다. 현종의 치세시기에 문화의 꽃이 만발하여 서울 장안(長安)은 정치·문화의 중심지로서 태평성대를 누렸다. 통일제국으로서 한나라에 이어 제2의 최성기를 이루어, 당이 발전시킨 문물과 제도는 동아시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균전제의 모순으로 땅 없이 유랑하는 농민이 많아지고, 끊임없는 전쟁으로 백성들은 변경으로 강제 출병되고 과중한 수취로 시달리는 등 현종 말기에 지배체제의 모순이 나타나고 당조 와해의 징조가 나타났다. 게다가 현종은 양귀비에게 빠져 국사를 소홀히 하여 간신들이 들끓고 권력층의 사치는 더욱 심하여 민심은 더욱 흉흉하였다. 결국 755년 안녹산의 난이 발발하여 이민족이 흥기하게 되고 사회, 경제적 불안이 가중된다. 이 반란은 9년 동안 계속된 끝에 이민족의 도움으로 겨우 진압하였지만 조정에서 완전히 평정할 힘은 없었다. 이 반란으로 균전법을 기반으로 하였던 고대 중국사회는 몰락의 첫발을 내디뎠으며, 반란 후 당조의 정치체제도 일변하였다.
이렇듯 당 왕조가 번영의 정점에 이르다가 급속히 쇠락하게 된 전환기에 이백이라는 대시인이 탄생하게 된다.
2. 이백 (李白/701~762)
이백은 자가 태백이며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로 당대 가장 뛰어난 시인이자 중국 문학 사상 굴원을 잇는 위대한 시인으로서 또한 두보와 함께 ‘이두(李杜)’로 병칭되는 중국 최대의 시인 시선이라고 불린다.
그는 당나라 701년 측천무후가 왕위를 찬탈한 해에 서역에서 태어나 현종과 숙종 시기에 활동하였다. 이백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으로 끝난다. 어린 시절에는 독서와 검술에 정진하고, 때로는 유협의 무리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 사천성 각지의 산천을 유람하기도 하였으며, 민산에 숨어 선술(仙術)을 닦기도 하였다.
그는 25세 때 촉나라를 떠나 양자강을 따라서 강남·산동·산서 등지를 유람하며 한평생을 보냈다. 젊어서 도교에 심취했던 그는 산중에서 지낸 적도 많았다. 그의 시의 환상성은 대부분 도교적 발상에 의한 것이며, 산중은 그의 시적 세계의 중요한 무대이기도 하였다. 아내가 4명이었고 가정에 정착한 적은 드물었다고 한다. 가정이나 국가에 매이기엔 그가 너무나 자유인이었기 때문일까?
맹호연, 원단구, 두보 등 많은 시인과 교류하며, 그의 발자취는 중국 각지에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43세경 현종의 부름을 받아 장안에 들어가 한림공봉(翰林供奉)이 되었던 1, 2년이 그의 영광의 시기였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의 실현을 기대하였으나, 한낱 궁정시인으로서 지위에 만족해야 했다.
공직생활을 하면서도 이백은 일반적인 관행과 권위를 무시하고 술과 벗하면서 자유를 추구했다. 또한 술에 취한 척하며 당시의 세도가 고력사에게 신발을 벗기라고 할 만큼 권력자에게 오만하기도 하였다. 《청평조사(淸平調詞)》 3수는 궁정시인으로서 그가 현종·양귀비의 모란 향연에서 지은 시이다. 그는 양귀비의 아름다움을 비련의 여인 조비연에게 비유함으로써 고력사의 모함으로 장안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이때가 그의 나이 마흔 네 살이었다. 그때부터 시작된 표류 생활은 실의와 가난의 연속이었다. 장안을 떠난 그는 하남으로 향하여 낙양·개봉사이를 유력하고, 뤄양에서는 두보와, 개봉에서는 고적과 지기지교를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