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어학 러일전쟁과 을사조약에 대한 조선 내부의 대응 -유생들과 기타 백성들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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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문어학 러일전쟁과 을사조약에 대한 조선 내부의 대응 -유생들과 기타 백성들을 중심으로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러일전쟁과 을사조약에 대한 조선 내부의 대응
-유생들과 기타 백성들을 중심으로-
1. 서론
2. 일본군의 압력
1) 군율 시행과 군사경찰 운용
2) 군용지 수용
3) 인력 동원
3. 유생들의 대응
1) 대응양태: 상소, 자결, 통문, 거의, 거수, 외교
2) 현실인식과 대응논리
4. 기타 백성들의 대응
1) 대응양태: 시설파괴, 집단항쟁ㆍ의병운동, 부일, 피난, 종교활동
2) 현실인식과 대응논리
5. 결론
1. 서론
일본 군당국은 제3국이자 비교전국인 한국의 민간인에게 군율을 적용시켜 군사경찰에 의한 군정과 통제를 실시하였고, 토지를 강제 수용하였으며, 인력을 동원했다. 각종 저항운동을 진압했던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러한 행위들은 전국 백성들이 국권상실의 실상을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해주었다. 그들의 황무지개척권 요구나 통감부의 경제정책도 국권침탈의 실상을 인식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직접적인 물리력을 행사했던 폭력집단으로서의 군대와 경찰의 역할에 더 주목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반일감정이 고조되고 항일운동의 시대가 열렸다. 1904년에는 백성들의 비조직적인 저항운동이 주종을 이루었으나, 1905년부터 의병전쟁이 시작되고 을사조약을 계기로 1906년에 본격화되었다.
러일전쟁과 을사조약에 대한 한국인의 대응양태는 학계에서 주로 신분별로 검토되었다. 이러한 연구는 신분별 대응양태를 종합ㆍ비교한 경우와 崔永禧, 「乙巳條約 締結을 前後한 韓國民의 抗日鬪爭」, 『史叢』12, 1968; 鄭昌烈, 「露日戰爭에 대한 韓國人의 對應」, 歷史學會 編, 『露日戰爭前後 日本의 韓國侵略』, 一潮閣, 1986; 구대열, 「디모클레스의 칼?-100년 후 돌아본 러일전쟁의 의미」, 『러일전쟁과 동북아의 변화』, 선인, 2005; 조재곤, 「1904~5년 러일전쟁과 국내 정치동향」, 『國史館論叢』제107집, 2005.
특정 대상을 한정해서 고찰한 경우로 나눌 수 있다. 의병운동에 관한 다수의 논문들을 제외하고, 다음의 논문들을 들 수 있다. 김도형, 「한국근대 재야지배세력의 민족문제 인식과 대응」, 『역사와 현실』제1호, 1989; 서영희, 「러일전쟁기 대한제국 집권세력의 시국대응」, 『역사와 현실』제25호, 1997; 송지연, 「러일전쟁이후 일제의 軍用地 收用과 한국민의 저항-서울(용산), 평양, 의주를 중심으로」, 『이대사원』제30집, 1997; 조재곤, 「대한제국 말기(1904~1910) 褓負商 단체의 동향」, 『北岳史論』5, 1998; 柳永烈, 「韓末 愛國啓蒙運動과 尹致昊」, 『史學硏究』제38호, 1999; 權九熏, 「대한제국기 일본군의 침략과 민족의 저항」, 건국대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0; 백동현, 「러,일전쟁 전후 민족 용어의 등장과 민족인식-『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를 중심으로-」, 『韓國史學報』제10호, 2001; 金鍾俊, 「進步會ㆍ一進支會의 활동과 鄕村社會의 동향」, 『韓國史論』48, 2002; 최기영, 「러일전쟁 발발 직후 지식인의 정치개혁론」, 『한국 근대 계몽사상 연구』, 일조각, 2003; 홍순권, 「‘을사늑약’ 전후 개화 지식인들의 정국인식과 대응」, 『한국독립운동사연구』제24집, 2005; 현광호, 「열강에 의존한 중립화의 한계, 러일전쟁과 고종」, 『내일을 여는 역사』겨울호(제26호), 2006.
주목할 것은 정창렬이 보인 시각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한국 정부와 개화사상가들은 한국 민중을 적대시 한 일본의 태도를 묵인ㆍ동조했고, 반대로 민중은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저항의 주체가 되었다. 그는 유생의병과 화적 출신 의병이 ‘동지적 접촉’을 이룬 사실을 중시하고 의병사상이 내적으로 발전ㆍ변모해 민권과 민생을 회복함으로써 민족 모순을 해결하려 했다고 설명하였다. 이런 주장은 한국사회 변혁운동의 역량을 민중의 역사적 경험에서 찾으려는 동기에서 제기된 것으로 의병전쟁이 1862년 三南民亂 이래 농민전쟁의 전통을 계승했다고 보는 조동걸의 趙東杰, 「義兵運動의 韓國民族主義上의 位置(上)」, 『한국민족운동사연구』1, 1986; 趙東杰, 「義兵運動의 韓國民族主義上의 位置(下)」, 『한국민족운동사연구』3, 1989; 조동걸, 「光武農民運動과 申乭石 義兵」, 『한국근현대사연구』제19호, 2001.
시각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의병운동의 민중적 성격은 金度亨, 「韓末 義兵戰爭의 民衆的 性格」, 『義兵戰爭硏究(上)』, 지식산업사, 1990. 김도형은 1905년 이후의 의병전쟁이 농민전쟁의 이념을 계승해 민중을 주체로 성장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는 의병부대의 실질적 전투력을 농촌의 반실업적 농민층, 소상인층, 수공업자, 임노동층, 화적, 포수 등이 제공했다고 보았다. 사례로서 화적출신 의병과 1905년 이후 호남의병에 동학여당이 참여한 사실을 들었으며, 이 추세는 1907년 이후에 더 명확해진다고 하였다.
군대해산 후에 보다 확연해지지만, 중기의병 의병운동에 관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가운데 러일전쟁 이후의 의병운동이 여러 가지로 분류─중기의병, 후기의병, 병오의병, (전ㆍ후기)을사의병 등등─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삼분법을 좇아 이 시기의 의병을 중기의병이라고 칭하기로 한다.
때 민중층이 유생층과 제휴해 전투력을 제공함으로써 과거보다 비중이 커진 사실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하지만 그 같은 제휴가 유생의병의 봉건성을 상쇄시켜주지 못하는 까닭에 중기의병의 계급연대성을 높이 사서 민족주의운동으로 마냥 띄워줄 경우, 민중의 계급적 요구를 드러내고 민중민족주의를 부각시키려던 그들의 의도는 희석되고 만다. 그런 점에서 이이화는 근대 민족주의운동의 외연을 지나치게 넓히는 것, 예컨대 최익현의 의병운동을 민족주의운동으로 보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그는 을사조약으로 절정에 이른 유생들의 저항은 중세적 가치질서의 와해를 반대한 것에 불과했다고 주장하였다. 李離和, 「韓末 儒生層의 現實 認識과 義兵鬪爭-崔益鉉의 思想과 政治活動을 中心으로」, 『國史館論叢』15집, 1990, 2쪽.
이러한 이의제기는 그들이 과연 척사론의 철저한 고수라는 경직된 태도로 일관했는지 아니면 근대지향적으로 퇴색ㆍ변모했는지를 다시 짚어볼 필요를 발생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