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의병운동과 의병전쟁

 1  한말의병운동과 의병전쟁-1
 2  한말의병운동과 의병전쟁-2
 3  한말의병운동과 의병전쟁-3
 4  한말의병운동과 의병전쟁-4
 5  한말의병운동과 의병전쟁-5
 6  한말의병운동과 의병전쟁-6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한말의병운동과 의병전쟁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한말의병운동과 의병전쟁
우리나라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외세 특히 청일전쟁 이후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노골적으로 야욕을 드러내는 일제에 대항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반침략 민족운동을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부르주아 계층이 주도한 독립협회 운동이나 애국계몽운동과는 달리 당초 의병전쟁은 위정척사계열의 봉건 유생층과 갑오농민전쟁의 농민군 중 일부 잔여세력이 일으킨 반외세 무장투쟁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이러한 의병항쟁은 점차 역사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그 주체와 구성과 지향이 바뀌어갔다.
대체적으로 전체 의병전쟁의 발전과정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전기의병은 1880년대 초반의 척사위정운동을 계승한 유생들이 을미사변과 단발령 등에 자극되어 일으켰다가 아관파천으로 해산된 을미의병이었다. 을미의병이 해산된 후에도 갑오농민전쟁의 이념을 계승한 농민층의 민란이나 항조(抗租)나 항세(抗稅) 운동 그리고 활빈당, 영학당, 남학당 등의 항쟁이 계속되었다.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계기로 전기 의병세력과 이들 농민항쟁 세력 등이 결합하여 중기 의병전쟁이 전개되었고 을사의병이라 한다. 이후 1907년 군대 해산을 계기로 중기 을사의병세력과 해산 군인이 합세하여 추진하는 의병 전투화로 발전하는 정미의병으로 이어진다.
의병운동이 시작되다, 갑오을미 의병
◎ 갑오의병
의병항쟁은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직후부터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유생을 중심으로 한 재야지식인들은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를 ‘갑신흉적’이라고 비난하면서 처벌할 것을 요구, 양성에서 이교석 같은 유생이 의병을 모집한 것을 보면 당시 유생들의 개화당에 대한 인식과 항일적인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전기의병단계라 볼 수 있는 본격적인 활동은 1894년 6월 갑오변란이 일어나자 척사유생을 비롯한 이들이 민족 존망의 위기 상태로 받아들였으며, 이어 한반도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일본의 사주를 받는 친일적 개화정권의 정치·사회적 개혁정책을 일본으로의 예속정책으로 인식하여 무력투쟁을 감행했던 이 시기부터이다. 그중 지평의 안승우, 홍주의 안창식, 철원의 홍범도 등은 비록 모병 단계에 그쳤지만, 안동의 서상철, 상원의 김원교 등은 의병을 모집하여 무력투쟁을 전개하였다. 서상철은 갑오변란으로 경복궁이 유린당하고 고종이 핍박당한데 분기하여 안동에서 기병하여 격문을 발표하고 1894년 7월 안동향교에서 거의하였다. 상원의병은 관료출신인 김원교 등이 상원관아를 공격하면서 시작하였는데, 김원교는 반침략·반개화 이념으로 봉기하여 1895년 7월 22일 상원관아에서 무기와 탄약, 그리고 미곡 등을 탈취한 뒤 관군과 일본군이 추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재령의 장수산성으로 이동하여 봉산, 재령 등지에서 동학 접주들에게 통문을 돌려 의병에 참여할 것을 권고, 이에 따라 동학군의 일부가 장수산성으로 합류하였다. 김원교는 격문을 발표하고 제천의식을 거행한 후 해주부 공격을 추진했으나 해주부의 관군과 일본군이 8월 12일 장수산성 공격하자 의병부대는 평안도 덕천방면으로 이진하여 9월 중순까지 계속 투쟁하였다.
◎ 을미의병
* 전개
1895년 8월 20일 명성왕후가 일본인들에게 시해당한 을미사변 발생하자 이러한 일제의 만행에 서울을 비롯한 지방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날 조짐이 거세졌다. 폐비조칙이 공포된 1895년 8월 23일 서울에서는 창의소(倡義所) 의병으로서 싸울 것을 호소하며, 그 의병을 훈련시키고 지휘하기 위하여 세운 조직
고시문이 나붙었으며 9월 초에는 ‘왕후의 폐서인에 신하된 자로서 복수토적(復討賊)의 의거가 없는가’는 고시문이 지방에 나돌기도 하였고 또한 서울 종로에는 국모의 죽음은 일본인의 소행임을 알리는 방이 붙기도 했다.
을미사변 직후 일어난 국수보복을 기치로 한 항일의병은 1895년 9월 18일 무과 출신 문석봉을 주축으로 유성에서 시작되었는데(유성의병), 의병 규모는 600여명에 달했고 그 가운데는 동학군 진압 때 휘하에 있던 인물들 다수 참여했다. 1895년 11월에는 김이언이 만주의 삼도구에 거점을 두고 초산군 아전 출신 김봉현과 동학접주였던 김창수(김구)와 함께 압록강 양안의 포수 300여명을 모병하여 의진을 결성하여 이들은 국모 시행에 항거하는 격문을 발표하고 압록강을 건너 강계읍으로 진격했으나 관군의 반격으로 패하였다. 이후 김창수는 신천으로 남하하여 재기병을 시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