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어학 근대 전전 의 천황과 황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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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근대 (전전)戰前의 천황과 황실상
일본화가 안고 있던 정치적 역할
근대 일본의 미술은 서구의 예술개념, 장르의 침입에 의해 재구성되었다. 그 속에서 일본화라는 장르는 그 주제표현의 양면에 있어 일본국내의 광범위한 감상자에 대해서 각각 안고 있는 자국의 이미지의 형성을 재촉한 기능을 완수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최근 메이지 시대의 시각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새로운 시야를 여는 연구가 계속 발표되고 있다. 예를 들어, 타키 코우지는 천황의 초상사진을 들어 그 도상분석을 하고 천황 이미지의 사회적인 유통 시스템과 민중의 천황관이 성립하는 과정의 관계를 날카롭게 분석하였다. 또한 T후지타니는 천황의 국내순행에 접점을 맞추어 근대 천황제의 확립의 과정에 있어 제도화된 시각문화가 정치적으로 귀중한 역할을 완수한 것을 밝혔다.
미술사 연구의 분야에서도 키노시타 나오유키는 근대 일본이 낳은 여러 가지 역사화 중에 국가의 기원을 이야기하였으며, 국민의식의 고양을 재촉하는 정치성이 인정되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인민고유와 지방순행
메이지 유신은 왕정복고로 실현되었다. 하지만 260년 이상에 걸친 막번체제 사회에서 천황이라는 존재는 위정자와는 달리 일반 민중과 동떨어져 있었다. 이는 메이지 초년에 천황의 지배와 그 정당성을 강조하는 「인민고유」(人民告諭)가 빈번히 만들어져 배포된 사실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천자님께서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님의 자손으로 이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일본의 주인이셨으며……참으로 신보다도 존귀하며 한 뼘의 땅, 한 명의 백성까지 모두 천자님의 것”이라고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奧羽人民告諭」의 원문 : 天子ハ、天照皇大神宮ノ御子孫ニテ、此世ノ始ヨリ日本ノ主ニマシマシ、神ノ御位正一位ナドニアルモ、ミナ天子ヨリ御ユルシ被遊候ワケニテ、誠ニ神サマヨリ尊ク、一尺ノ地一人ノ民モ、ミナ天子ノモノニテ、日本中ノフボニマシマセバ…
왕정복고는 ‘진무(神武)창업의 처음’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으나, 그것은 물론 단순한 복고가 아니라 근대 군주로서의 새로운 천황상을 이끌어내는 것이 진정한 목표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가(公家)사회의 깊숙한 곳에 틀어박혀 있는 천왕이어서는 안 되었다. 천황이 여태껏 민중에게 생소한 존재였던 상황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했다.
오쿠보는 1868년의 「오사카(大阪) 천도(遷都) 건백서」에서 “지금까지처럼 주상이라고 받드는 분이 옥렴(玉簾) 속에 있으면서……한정된 공경들 이외에는 알현할 수조차도 없는 실정이어서는 백성의 부모라는 천부의 직분에 어긋나는 것”이라 지적하고, “주상이 있는 곳을 운상(雲上)이라 하며, ……용안(龍顔)은 알현하기 어려운 것이라 생각하고, 옥체는 시골벽지에 행차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너무 과하게 추켜세워 받들려”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오쿠보에 의한 이 건의는 천황을 공가로부터 분리시켜 근대적인 군주로서 자립시킬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
이 해 9월에 천황이 처음으로 도카이도(東海道)로 행차한 것은(사실상의 도쿄 천도) 그 방침을 실현한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는 1876년에 시작된 천황의 지방순행에 의해 절정에 달하게 된다. 천황은 이 해에 도호쿠(東北)홋카이도(北海道)를 시작으로 18788081년 등 잇따른 대규모 순행을 전개했다. 메이지 초기에 집중적으로 추진된 천황순행은 권력에 의해 이데올로기적으로 만들어진 천황상이 민중의식과의 모순은 물론 갈등을 내포하면서도 민중자신에 의해 수용되어 나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여기서 메이지 정권이 특히 민중을 교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연출, 관리, 규제된 순행은 그 과정 속에서 민중의 천황에 대한 지지를 조달하기 위해 민중 속에 내재하고 있었던 민속적인 종교의식을 묵인, 이용했던 측면도 부정할 수 없다.
메이지 정권이 민속적인 행사나 의식에 강력한 개편과 규제를 가하면서도 그것을 정면에서 부정하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는 민중의 민속적인 반응 속에 천황에 대한 숭배를 유도할 수 있을 계기가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민중은 자신들의 전통적 자연적인 천황신앙의 연장선상에 권력에 의해 이데올로기적으로 창출된 근대적인 천황상을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상의 순행에서 천황은 결코 민중과 함께 하지 않았다. 순행 중 마차 속에 있으면서도 얼굴을 단 한번도 내보이지 않았던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과거 ‘옥렴 속에 있’던 천황이 전국을 순행한 것은 분명히 전례 없는 큰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