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그 한계성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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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조선왕조실록, 그 한계성을 중심으로
1. 머리말
오랫동안 正祖가 독살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은 꾸준히 제기되었다. 이를 대중들의 저변으로 확대시킨 사람은 『영원한 제국』의 저자 이인화였다. 이인화,『영원한 제국』(세계사, 1993)
그는 영남지방에서 전해 내려오는 정조독살설을 ‘작가의 말’에서 언급하고 있다. 그의 바턴을 이어받아 놀라운 필력으로 ‘정조독살설’을 주장한 이는 이덕일이었다. 그는 노론의 거두 심환지, 정순왕후, 그리고 어의 심인을 독살설의 중심인물로 추정하였다. 이덕일,『조선왕 독살사건 2(개정판)』(다산초당, 2009), 178.
개혁군주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 조선은 점차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Ibid., 180.
이러한 역사인식에 대해 유봉학과 같은 역사학자들은 정조독살설을 강하게 부인하였다. 여기에는 나름의 역사인식의 차이가 자리하고 있다. 그는 개혁가 정조 1인을 강조하는 것은 영웅사관으로서, 독재정치를 옹호하는 역사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고 우려하였다. 유봉학, 「정조독살설의 오류」, http://yoobh.korhistory.or.kr/myView.asp
이런 와중에 논쟁의 종지부를 찍어 줄 것으로 생각되는 귀중한 자료가 발굴되었다. 바로 ‘정조어찰첩’으로, 그동안 숙적으로 인식되던 심환지에게 보낸 개인적인 편지다. 이 편지에 의하면 심환지는 정조의 오른팔 역할을 충실히 한 것으로 밝혀졌고, 이는 관변사료인『조선왕조실록』의 내용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다. 史官이 객관적으로 눈에 보이는 현상에 집중하는 동안 정조는 심환지를 심복으로 부리며 막후정치를 벌였던 것이다. 이는 비밀리에 행해짐으로써 史官의 눈에 띠지 않았다. 새로운 사료의 발견으로 정조와 심환지의 사이를 갈등 구조로만 그리는 것은 한계가 있게 되었다.
어찌 되었든 그동안 비교적 정확한 사료로 평가받아왔던 조선왕조실록이 많은 한계를 노출하고 있음이 정조 어찰첩의 발견을 통해 확실시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었던 정조의 뜻에 반하는 심환지의 행동이 사실은 정조와 사전에 계획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그 어느 역사학자도 발견해 낼 수 없었다. 정조어찰첩의 발견은 역사학자의 해석이 더욱 중층적이고, 다면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수많은 변수를 놓치지 말아야 함을 다시 한 번 가르쳐 주었다. 재미있는 것은 정조어찰첩의 발견으로 정조독살설이 수면 위로 가로 앉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정조독살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심환지가 정조와 정치적 거래를 지속하면서도 이면에서는 딴 생각을 품고 있었고, 결국 정조에게 정치적인 비수를 꽂았다고 보고 있다. 이덕일,「정조독살설의 진실과 거짓」,『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역사의 진실, 2009), 276-314.
본 소고에서는 조선왕조 5백년을 관통했던 관변사료인 조선왕조실록의 한계를 살펴보려 한다. 그 유용성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를 위해 발제자는 ‘황사영백서’(1801)를 조선왕조실록의 천주교 관련 기록과 대조해 보려 한다. 관변 측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지극히 개인적인 편지인 황사영백서를 조선왕조실록과 대조했을 때, 조선왕조실록의 성격이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2. 조선왕조실록과 황사영백서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
조선왕조실록은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을 제외하였을 때 25대 472년간 총 1,893권 888책이 간행되었다. 권수로 치면, 중국 明실록이 2,964권, 淸실록이 4,404권으로 권수가 더 많지만 내용면에서 조선왕조실록이 우수한 것으로 평가된다. 일본중국베트남 등 유교문화가 퍼진 곳에는 모두 실록이 있었다. 그러나 편찬된 실록을 후대 왕이 보지 못한다는 원칙을 지킨 나라는 조선왕조뿐이며, 이 원칙의 고수로 내용면에서 다른 나라보다 더 충실한 것이 되었다. 또한 동아시아 대부분의 실록이 筆寫本이었는데 반해, 조선왕조실록은 거의 대부분이 활자로 인쇄되었다. 이는 다른 나라는 한두 질 생산에 그쳤으나, 조선은 실록을 후세에 온전히 전하기 위해 4-5본을 만들었기 때문에 활자 인쇄가 더 편한 방법으로 택해졌던 것이다. 이는 조선시대 활자 인쇄술의 토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美의식의 발동으로 활자문화에도 기여하였다. 이태진,「조선왕조실록: 나의 接觀記」,『한국사 시민강좌』23(일조각, 1998), 27-28. 특히 이태진은 조선왕조실록의 천문, 기후, 기상 등의 기록을 통해 서구역사학계에서 얘기되고 있는 ‘17세기’위기론을 한국사에도 적용하고자 하였다(이태진,「소빙기(1500-1750년)의 天體 現象的 원인:『朝鮮王朝實錄』의 관련 기록 분석」,『국사학논총』72(1996), 89-125.). 이 연구에 대한 많은 견해가 있겠지만, 실록 내용의 충실도에 대한 근거로서는 학문적 기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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