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 대중 매체에 비춰진 정조의 이미지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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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문화] 대중 매체에 비춰진 정조의 이미지 변화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I. 서론

II. 본론
1. 비극 속의 세손 (90년대 초반까지)
1.1. 시대적 배경
1.2. 대중 매체 속의 정조
1.2.1. 혜경궁 홍씨
1.2.2. 하늘아 하늘아 / 한중록
1.2.3. 대왕의 길
2. 권위적인 군주 (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까지)
2.1. 시대적 배경
2.2. 정조 암살설
2.3. 대중 매체 속의 정조
2.3.1. 영원한 제국
2.3.2. 역사스페셜
2.3.3. 기타 작품들
3. 인간적인 성군
3.1. 시대적 배경
3.2. 대중 매체 속의 정조
3.2.1. 이산
3.2.2. 화성에서 꿈꾸다

III. 결론

본문내용
1.2.2. 하늘아 하늘아 / 한중록

1988년에는 한중록을 바탕으로 한 사극이 두 편이나 방영되었다. 방영된 후 오랜 시간이 지난 작품들이기 때문에 사실 구체적인 자료를 수집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하여 이 두 드라마에 대한 조사는 리뷰와 감상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씨네21에서는 혜경궁 홍씨의 삶의 궤적을 통해 진정한 여인의 길을 조명했다고 하늘아 하늘아를 소개하고 있다. 한중록의 경우 제목에서부터 한중록을 중심으로 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하늘아 하늘아와 한중록 두 드라마의 배역을 맡았던 배우 기록을 통하여도 내용을 짐작해볼 수 있다. 사도세자 역은 정보석, 최수종이 각각 맡았으며 혜경궁 홍씨 역은 하희라, 최명길이 맡았다. 반면 정조 역은 유/무명 아역 탤런트가 맡았다.

1.2.3. 대왕의 길

1998년 방영된 MBC 드라마 대왕의 길에서는 박근형이 영조, 임호가 사도세자로 출연하여 부자간의 갈등을 연기했다. 대왕의 길에서 조명했던 것은 사도세자였다. 자연히 정조는 부차적인 역할에 불과했다. 90년대 후반에 방영되었다는 점은 비극 속의 세손 정조 이미지를 담은 사극들의 주된 시대적 범위에서 벗어나지만 내용 상으로는 명백하게 비극 속의 세손 정조 이미지를 담고 있다. 시청자에게 각광 받지 못하고 시청률 저조로 조기종영되었다는 사실이 시대와의 불일치를 변명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대왕의 길은 이전의 사도세자를 다룬 사극과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다룬 사극들은 한중록에 충실하여 사도세자가 정신적 문제를 가지고 있던 것으로 나타났으나 대왕의 길에서는 어느 정도 그러한 관점에서 벗어나 당쟁의 여파 속의 희생양으로 나타났다. 이를 위하여 조선왕조 실록 등 다양한 사료들을 동원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중록에 나타난 혜경궁 홍씨의 시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이 혜경궁 홍씨와 홍씨 일가가 사도세자에게 우호적인 위치로 나타난다는 점을 통하여 드러난다.

2. 권위적인 군주 (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까지)

2.1. 시대적 배경

90년대 중반 이후로 대세를 이룬 정조 이미지는 강력하고 능력 있으며 문무를 갖춘 개혁 군주였다. 이러한 권위적인 지도자로서의 정조 이미지의 등장은 민주화 이후 경제 위기를 겪으며 나타난 강력한 지도자, 구체적으로는 박정희에 대한 향수를 반영한다. 90년대에는 군부정권도 물러나고 민주화가 다소 진전되었으나, 각종 부정부패상 들과 경제위기로 인하여, 대중들에게 국민의 정신적 지주가 부재한 상황이었고, 정신적 아노미 상태에 있던 시기들이었다. 그러하다보니, 과거의 강력한 군주를 그리워하는 향수가 생겼으며, 심지어 군사정부를 긍정하고 그 때를 그리워하는 정서까지 나타나던 시기였다.
강력한 군주 정조 이미지는 정조 암살설과 맞물려서 나타난다. 부국강병을 이루려 했으나 모종의 음모에 의하여 암살 당한 지도자라는 이미지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등의 소설에 나타난 기성 세대가 추억하는 박정희의 이미지와도 일치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조의 이미지가 완전히 왜곡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실제로도 정조에게는 이와 같은 권위적인 군주로서의 면모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정조는 조선의 군자(君子)를 자처했으며 스스로를 ‘수많은 강을 비추는 달과 같은 임금’이란 뜻의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 칭했다. 개울들이 달빛을 받아 빛나고 있지만 달은 오직 하나이고, 그 달은 바로 정조 자신이고 신하와 백성들은 개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2.2. 정조 암살설의 허구성

정조의 죽음에 대한 진실은 확인할 수 없는 것이지만 정조가 암살된 것이 숨겨져 왔던 진실인 양 묘사되는 것은 경계해야할 문제이다. 대중 매체에서 제시되는 정조가 암살되었다는 의혹을 품을 수 있는 근거들에 반하는 다양한 근거 역시 존재한다.
독살이라면 일거에 추진되어 정조는 어느날 갑자기 급서하여야 했다. 그러나 그는 거의 한 달에 가까운 투병 끝에 서거하였던 것이다. 정조 자신이 [수민묘전] (壽民妙詮)이라는 의학에 관한 책을 저술할 정도로 전문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서거하던 날까지 투약과정에서 그는 직접 약처방에 관여하였다. 또 마지막까지 내의원 도제조로서 정조 간병을 지휘하였던 사람도 정조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던 소론 시파의 우의정 이시수(李時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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