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어학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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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
1. 작가소개
연암(燕岩) 박지원(朴址源=1737~1805)은 영조 13년 2월 5일에 한양 반송방(盤松坊) 야동(지금의 아현동 부근)에서 반남(潘南) 박씨 박사유(朴師愈)의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자는 중미(仲美)요, 호는 연암이고 또 별호를 미재(美齎)니 총계(叢桂)니 계산(桂山)으로도 썼다. 그리고 연암이 죽은 뒤 정경대부(政卿大夫)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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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의 집안은 대대로 벼슬이 높던 명문대가로 선대의 충익공(忠翼公) 박동량(朴東亮=1569~1635)은 벼슬이 도승지 판의금부사까지 오르고 나라에 공로가 커서 금계군(錦溪君)까지 봉해진 인물이요, 그 뒤 선조들도 대대로 대사헌, 판서, 참판 등의 관직을 지냈다. 그의 조부 박필균(朴弼均)은 관찰사, 대사가, 지동녕부사까지 오른 인물로 시호가 장간공(章簡公)이며 연암을 직접 임지로 데리고 다니면서 가르친 인자한 조부였다.
연암은 어려서 부모와 떨어져서 15년 연상인 큰 형 박희원(朴喜源; 1722~1767) 내외 밑에서 자랐으며 5세부터는 할아버지가 경기도 관찰사로 부임해가자 따라 다니면서 훈도와 초학 공부를 하였다. 연암은 어려서부터 약질인데다가 잡병이 많아, 자애로운 할아버지는 불쌍히 여겨 많은 시간을 종들과 같이 밖에 나가 놀게 하였다. 그러나 이 때 하층 계급의 아이들이나 할아버지에게서 듣고 본 이야기들은 감수성이 예민하던 연암의 소년기에 장차 「광문자전」 등을 짓는데 영향을 주었다.
16세 때 전주 이씨인 유안재(遺安齋)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 후 장인에게서 맹자를 강의 받고, 이어서 처삼촌인 학사공(學士公) 이양천(李亮天)에게서 실학을 공부했다. 이양천은 실학사상이 농후했던 학자로, 연암음 이양천에게서 『사기』를 배우면서 특히 도 배웠다. 이것은 연암이 소설을 쓰는데 큰 영향을 주었는데, 이 때에 을 지었다.
그 후 20세 때 봉원사에 들어가 독서하며 허생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것은 장차 을 쓰게 된 모티브가 되었다. 그러던 중 24세인 1760년 조부 박필균이 돌아가시자 연암의 곤궁한 삶이 시작되었다. 28세에는 , 후서를 썼고, 32세가 되던 1768년에 박제가가 제자로 입문하면서 여기서 북학파가 형성되어 갔다. 36세 때 선산을 이장하려고 답사하다가 황해도 금천의 연암 골짜기를 발견하였는데, 1777년 41세 때 당시의 세력자 홍국영한테 밉보여 그의 박해로 그곳에 피난 가서 숨어 살았다. 이 때 부터 연암이란 호를 쓰기 시작했다. 1779년 43세에는 북학파이던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와 규장각의 검서관이 되어 ‘4검서관’의 명성을 들었다. 다음 해인 1780년 2월 홍국영이 실각 후 4월에 사약을 받아 죽게 되자 연암은 다행히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 해 5월 25일에 8촌형인 금성도위(錦城都尉) 박명원이 청나라 고종의 70수 천추절 사은겸진하정사로 연경으로 사신 갈 때 따라 갔다가 이 해 10월 27일에 귀국하였는데, 돌아온 후 서울 처남 집과 연암 골짜기를 내왕하면서 를 쓰기 시작하였다. 이 때 박제가는 를 썼고 연암은 그 서문을 썼다.
47세가 되던 1783년 연암은 서문을 쓰면서 『열하일기』 26권을 완성하였다. 이 해에 돈독하던 담헌 홍대용이 별세하였고 연암은 그 후로 일체의 음악을 끊었다.
1786년 7월에 친구인 유언호가 천거하여 선공감 감역으로 임명되었는데 그의 나이 50세에 처음 얻은 벼슬이었다. 다음 해 1월에 부인이 51세로 별세하고 그 뒤 연암은 부인의 부덕을 기리며 독신으로 여생을 보낸다. 52세가 되던 겨울 공선감역의 임기가 끝나고 다음 해 6월에 평시서(平市署)의 주부로 승진하였고, 55세 때 한성 판관으로 전보되어 곡물 유통에 대한 정책적 탁견을 폈다. 이 해 12월, 안의현감으로 임명되어 56세부터 60세까지 안의현을 다스리면서 천주교에 대한 선정을 베풀었다. 61세가 되던 1797년 7월 충청도 면천 군수로 임명되어 64세가 되던 1800년 8월 양양 부사로 승진될 때까지 부임하였다. 그러던 중 순조 재위 5년. 1805년 10월 20일 서울 가회방 재동 자택에서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 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