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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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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다산 정약용

1. 다산 정약용 선생
2. 업적
가. 배다리 준공
나. 수원 화성
다. 다산의 경제관
3. 저서
4. 결론
1. 다산 정약용 선생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선생은 조선 정조 때의 문신이며 실학자이자 저술가·시인·철학자·과학자로서 뜻을 펼쳤다. 호는 가장 잘 알려진 다산(茶山)부터 사암(俟菴)·삼미(三眉)·태수(苔)·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다.
그는 1789년(정조13)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가주서, 검열, 수찬, 경기도 암행어사, 동부승지, 병조와 형조의 참의를 역임하였다. 그는 부친이 지방관으로서 여러 지방관청에서 근무하였기 때문에 부친을 따라 다니며 각 지방의 실정과 백성들의 생활 상태를 살필 수 있었다. 16세 때에는 실학자 이익의 유고를 읽고 그에 심취하였으며, 스승으로 섬기며 따랐다. 그는 이익의 제자들과 교류하고 박제가 등 북학파 학자들과도 긴밀하게 접촉하였다고 한다. 북학파의 사상을 포용하기는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정약용은 중농학파였다. 그래서 그는 일하는 자가 토지를 가져야 하고, 토지 제도의 개혁을 통하여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여전제와 정전제를 주장하여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다산의 생애를 살펴봄에 있어서 특기할 일은 그가 젊어서 이벽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천주교의 교리와 서양의 사정을 배웠다는 것이다. 1801년 정조가 죽고, 남인들을 사교도로 몰아 탄압과 박해를 가한 이른바 신유박해가 일어났을 때 다산은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황사영백서사건으로 전라도 강진에 이배되었다. 그는 여기에서 유배가 풀릴 때까지 18년간 경세적 학문에 전념하여 그 거대하고 독특한 학문 체계를 세우고, 500여권에 달하는 많은 저술을 남겼다.
정약용 선생은 학문을 받아들임에 있어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자세를 가졌기 때문에 청나라에서 새롭게 전래된 경전 해석 방법인 고증학이나 서양에서 전래된 서학 등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고증학의 실증적 태도 등 객관적 학문 자세는 따랐지만, 실증이라는 수단에만 빠지지 않고 실용이라는 목적을 추구하였다. 즉, 인간과 사회가 보다 풍요롭게 사는 것을 추구하였다고 할 수 있다.
2. 업적
가. 배다리 준공
당시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 세자의 묘소에 참배를 가기 위해서는 한강을 건너야 했는데, 노론의 암살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던 정조는 배를 타고 강을 건너기보다는 다리를 건너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여 정약용에게 다리를 놓으라고 특명을 내렸다. 폭이 1킬로미터가 넘는 한강에 다리를 놓으라는 것은 당시의 과학 기술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정약용이
생각해 낸 것이 바로 배다리였다. 한강에 비슷한 크기의 배를 연달아 띄우고 배 위에 널판을 깔아, 사람과 마소가 지나가게 하는 것이다. 배다리는 단순히 건너기 위한 기능만을 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배로만 옮길 수 있었던 물자의 이동을 원활하게 하여 조선의 물류에도 큰 역할을 하였으며, 설치와 철거가 쉬웠기 때문에 대규모의 군사가 빠른 시간 안에 한강을 건널 수 있어 유사시에 활용방도가 높은 기술이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도 이용될 수 있었다. 정약용이 배다리를 설계할 당시 배와 배 사이의 간격은 어느 정도 떼어야 안전한지, 배와 배를 연결하는 사슬은 어느 정도 두께여야 지탱할 수 있는지, 널판의 너비는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 널판과 널판은 어떻게 이어야 하는지, 몇 척의 배가 필요한지, 하나하나 확인해야 했다. 대부분의 양반이 기술을 천하게 여기는데, 정약용은 그렇지 않았다. 일일이 장인들을 찾아다니며 문제점을 고쳐 나갔다.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엄청난 사람과 물자를 모으는 능력도 대단했다고 한다. 정조는 이 계기로 정약용을 크게 쓰기로 결심하고 초계문신으로 임명하였다.
나. 수원 화성
수원 화성의 건립 배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