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문학사상 정과 개성의 문학 교산 허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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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의 문학사상 정과 개성의 문학 교산 허균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정과 개성의 문학』- 교산 허균(蛟山 許筠 : 1569 ~ 1618)
□ 서 론
조선 중기의 혼란한 시대에 잦은 국난과 외침파쟁에 시달리면서도 만연한 부패로 무너져가는 국가를 걱정하고 새로운 이념을 제시하고자 했던 문인이자 개혁사상가인 허균은 통념적 도덕률에 굴종하기보다는 본성과 감정이 요구하는 대로 자기 방식의 실천적인 삶을 파란만장하게 살다 간 ‘체제의 아웃사이더’라 할 수 있는데, 당시의 체제 순응적인 지식인들로부터는 “천지간의 한 괴물”이나 “성품이 올빼미 같고 행실은 개와 돼지 같은 인물”로 폄하되는 한편, 조선 왕조가 막을 내릴 때까지 역적으로 비판받았지만, 현대에 들어와서는 중세적 이성으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뚜렷한 개성과 다양성을 지닌 개혁적인 정치사상가국방이론가진보적 종교가문학가 등 행동하는 지성으로서 후대에 모범을 보인 인물로 대접받고 있다.
성리학 이외의 모든 학문이 이단으로 간주되던 시대에 허균은 불교도교에 심취했는가 하면, 양명학 좌파를 넘나들었고, 심지어는 서학까지 수입했으며, 서얼ㆍ천민과도 교류하면서 현실 비판적인 시문과 체제 저항적인 글을 남기기도 했는데, 지금부터 허균이 어떤 삶을 살았으며, 그의 문학에는 무엇이 있고, 그 작품들은 문학사상사에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 본 론
○ 허균의 생애 조선고전문학사, 허문섭, 한국문화사 1996, p.328~329
허균은 조선 중세 문학에서 처음으로 농민들의 반봉건투쟁을 반영한 사회소설을 쓴 진보적 작가이며 시인이다. 허균은 1569년 서울의 이름난 양반문인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허엽은 당시의 저명한 유물론적 철학가 서경덕의 수제자였으며 그의 두 형 허성, 허봉과 누이 허난설헌은 모두 당대의 저명한 진보적문인들 이였다. 이러한 명문재가의 가정적 환경은 그의 문학 수업에 양호한 영향을 주었다.
허균은 12세에 아버지를 여읜 후 편모슬하에서 자라났으며 서자 출신의 진보적 시인 이달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시문을 배우면서 그의 사상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호탕하고도 다정다감한 성격을 가진 허균은 이달의 영향 하에 서류 출신의 문인들과 많이 교류하고 또 그들을 깊이 동정하기도 하였으며 따라서 적서차별의 불합리한 사회신분제도에 대하여 점차 의혹과 불만을 갖게 되었다.
1593년(25세) 허균은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벼슬길에 나섰으며 1603년에는 방명사절단 수원 서장관의 신분으로 중국 연경을 내방하였는데 이때를 계기로 하여 중국의 문화와 유럽의 문명도 접촉하고 자기의 시야도 넓히게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특히 중국 명대 소설들을 널리 접촉하고 연구하였는데 그가 거나 의 발문을 썼다는 등 사실들은 이를 말해준다.
중국에서 돌아온 이후 허균은 적서차별대우 폐지를 주장하면서 집권층의 비위를 거슬렀으므로 1610년 그들의 모해를 입어 유배를 당했다. 이 유배 살이를 통하여 고통 받는 농민들의 처지를 직접 목격하고 당대의 사회적 모순에 대해서도 점차 주의 깊게 관찰하게 되었다.
그러나 허균의 생활과 사상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한 것은 광해군(1609~1623) 집정시기의 격화된 농민투쟁과 서민 계층의 반봉건적 진출이었다. 유배지에서 풀려나와 다시 벼슬길에 나서서 좌삼찬 등을 역임한 그는 농민 투쟁에 큰 관심을 돌렸을 뿐 아니라 당시 경기도 여주의 소양강반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서자당의 반 정부활동에 가담하여 광해조를 뒤엎고 이 왕조 통치를 개혁하려 시도하였다. 그는 당시 이 왕조에 불만을 품은 서자출신들인 서양감, 박응서, 심우영 등과 연계를 맺고 또한 김개, 신광업, 하인준 등과 를 규합하여 광해조를 반대하는 각종 괘방, 참언들을 궁중과 서울 각 처에 유포하며 조정을 교란시키고 광해조를 뒤엎으려 하였다. 그러나 왕조전복의 계획이 미연에 탄로되자 그는 서자당의 다른 구성원들과 함께 반역의 죄로 1618년 참형되고 말았다. 그들의 반정부 활동은 농민들의 반봉건 투쟁과 직접 연결되지는 못하였으나 봉건적 신분차별제와 봉건 왕조의 폭정을 반대해 진출함으로서 사회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의 문헌들에서는 라고 하였는데 이는 이 왕조에 대한 그의 반역아적 생애를 말한 것이기도 하다.
○ 허균의 사상 許筠의 혁신사상, 김태준, 東岳語文學會, 東岳語文論集 33輯,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