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세계 최강대국 미국을 이끄는 유대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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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세계 최강대국 미국을 이끄는 유대인들
1. 홀로코스트 산업(Holocaust industry)
이스라엘 건국과정에서 유대인들이 결정적으로 승기를 잡은 것은 선진국들에 대한 로비, 막대한 자본력 뿐만 아니라 나찌에 의해 진행된 홀로코스트라는 전 세계적 동점심을 얻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보기에 홀로코스트와 팔레스타인의 장래문제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일이었다. 팔레스타인은 나찌와 손을 잡지도 않았고, 어디까지나 홀로코스트는 독일 또는 유럽의 문제에 불과했다. 유럽의 유대인 문제와 팔레스타인에서의 시오니즘 운동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은 너무나 부당한 일이였다. 하지만 역사는 끝내 그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 이유도 없이 자기 집에서 쫒겨나 오갈데 없는 국제적 난민이 되버렸으며, 자기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지도 못한채 이스라엘의 폭격과 살인, 고문으로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 팔레스타인들의 정당한 저항에 세계 정세는 무관심하고, 언론은 그들을 무자비하고 광신도적인 악의 축으로 만들어 내고 있다. 여기에 홀로코스트 산업이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1-1. 홀로코스트 산업의 등장
45년 전후 미국의 유대인들은 홀로코스트 문제를 거론하기는커녕 유대인 학살에 대해 ‘홀로코스트 : 구약성서의 번제燔祭- 원래 희생자를 통채로 태워버리는 특수한 제사라는 의미-’라는 거창한 용어를 쓰지도 않았다. 그들은 냉전의 분위기 속에 서독을 서방의 보루로 만들려는 미국 지도부의 전략에 맞추어 독일인과 화해무드를 만들기 위해 전범 문제를 건드리지도 않았으며, 홀로코스트에 대한 시온주의자들의 책임 문제를 회피하려는 계산도 있었다. 이스라엘 건국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비非민족주의자들이나, 노년층에 대해서 이스라엘의 시온주의자들이 나찌의 학살을 방관했다는 것은 미국의 유대인들이 결코 건드리고 싶지 않은 껄끄러운 문제이다. 나찌의 유대인 학살을 방관하면서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자신들의 이스라엘 건국 준비를 차분하게 주력할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은 아직 미국의 주류에 편입되지 못한 상태에서 외국국적의 동족에 지나친 애정을 보일 경우 ‘미국인으로서 정체성이 결여된 집단’으로 보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대부분 공산당 지지자였던 발틱이나 러시아 유대인들의 학살에 관심을 보였다가는 ‘빨갱이 사냥’에 혈안이 된 메카시 주의자들의 먹이감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말조심을 해야만 했다. 심지어 미국유대인위원회(AJC)는 메카시즘이 활개를 치던 시절, 자기들이 직접 작성한 블랙리스트를 국무성에 제출하는 충성을 보이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60년대가 되자 1인당 평균소득이 백인 미국인의 소득을 훨씬 능가하게 되었으며, 영화계와 언론계에서 유대인의 영향력이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졌다. 메카시즘도 잠잠해지고 백인 엘리트들의 전통적인 반유대적 태도도 변화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67년 아랍국가들과 이스라엘간의 3차 중동전쟁인 6일 전쟁(67년 6월 5일 -10일)이 일어났고, 이스라엘은 압도적인 승리를 이루어 낸다.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아랍권에 대한 군사적 재패 능력이 확인되자 미국은 이스라엘을 중동석유에 대한 미국의 통제기반으로 만들려고 했다. 물론 냉전의 분위기도 한 몫 작용해 소련과 아랍국가들간의 동맹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였다. 이스라엘이 미국의 동맹국이 되자 재미 유대인의 지도자들도 중동에서의 동족에 눈을 뜨고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한 동시 충성’을 외치게 된다. 특히 독일 유대인 출신 키신저가 68-77년 사이에 미국의 대외정책을 좌지우지하게 되자 미국과 이스라엘의 동맹 그이상의 동맹 관계를 공고히 한 절호의 기회였다. 키신저는 이스라엘을 이용해서 아랍의 들끓는 민족주의를 잠재우려는 것이 기본적인 중동전략이었다.
하지만 재미 유대인들에게나 미국의 정책 입안자들에게도 새로운 혈맹 이스라엘의 국제적인 이미지는 중요한 부담이자 걸림돌이었다.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점령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이스라엘군의 무조건 철수를 선언한 UN의 242호 결의안(67년 11월 22일 채택)을 무시하고, 팔레스타인들을 늘 고문 ,암살하는 이스라엘, 82년 레바논 침략과 같은 대형의 군사적 모험주의를 자행하는 이스라엘은 70년대에 들어와서는 유럽의 정치인들에게 불량 국가쯤으로 보였다. 마찬가지로 미국내에서도 흑인 시민권 운동의 여러 지도자들과 수많은 사회 운동가들이 이스라엘의 인종주의적 억압정치에 강한 불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미국의 정책 입안자들과 재미 유대인들에게 국내외에서 등장하는 반이스라엘 여론을 잠재울 묘법으로 ‘홀로코스트 카드’를 들어 비판자들을 억누르기 시작한 것이다.
1-2. 홀로코스트 산업의 전개
60년대 후반 70년대 초반부터 미국에서 ‘홀로코스트 붐’이 일어나 서방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번졌다.
홀로코스트를 “세계 역사상 비교 대상이 없는,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무자비한 범죄”, “오랜 시간동안 전세계를 지배한 반유대주의의 산물”로 규정함으로써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언제 다시 홀로코스트를 당할지 모를 고립무원의 피해자 집단의 보호자”로 그려내기 시작하였다. 이제는 이스라엘의 인권침해에 대한 어떤 비판도 “홀로코스트에 대한 모독”으로 일축하여 비판자를 “반유대주의자”로 몰아세울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