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퀴나스와 아리스토텔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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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아퀴나스와 아리스토텔레스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다. 그래서 어디엔가 의존하고 싶어 하고 의지할 곳을 찾는다. 그런 의미에서 아퀴나스의 주장에 나오는 ‘신’ 이라는 존재는 존재하기만 한다면 최고의 의지할 곳이 되지 않을까?
종교를 믿는 사람들 중에는 정말 신을 믿어서 그 신이 있다고 생각해서 믿는 것 일까? 그런 사람들도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신’이라는 존재에 기대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마음에 ‘신’이라는 허구의 존재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신에게 자신의 고민과 자신이 바라고 싶은 걸 바래보고 그런 것이 잘 해결 되었을 때 자신의 만족감을 채울 수 있다고 생각된다. 아퀴나스는 비록 신의 존재를 무조건적으로 있다고 주장하며 믿으라 하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신의 존재를 입증할 방법이 하나라도 있다면 모르겠지만 추상적인 개념의 신의 개념은 아직 믿을 수 없는 것이 그 한계인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부족해 보이는 신의 개념이 지금 현 세계에도 계속 믿어지고, 종교인들은 계속 생기고 신에게 의지 할 것이다. 그것은 왜 일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살기가 각박하다. 자신이 믿던 사람에게도 배신을 당하고, 자신이 사랑하던 사랑에게 버려지는 일이 빈번하다. 이런 세상에서 아무리 정신력이 강하고 의지력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의지할 곳이 필요하며 기댈 곳을 찾기 마련이다. 그래서 인간은 가정이라는 자신이 의지하고 기댈만한 곳을 만들지만 이마저도 솔직히 그렇게 의지가 된다고는 보기가 힘들 것 같다. 가족끼리도 점점 대화가 줄어들며 부모자식 간의 마음을 알 수가 없는 건 마치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세상이다. 이런 곳에서 살고 있는 인간이 얼마나 힘들까? 그러다보니 신이라는 절대자를 믿고, 의지 할 수 있는 존재로 따르는 것 이아닐까? 나도 기독교 신자이지만 신의 존재를 확신하지는 못한다. 교회를 오래 다니고 해봤지만 어머니만큼의 훌륭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런 나도 가끔 머리가 아픈일이 생기거나 바라고 싶은 일이 있으면 어머니와 새벽기도를 따라가서 조용히 속으로 기도를 해본다. 이런 행동을 했다고 해서 바로 고민이 해결되거나 하지는 않다. 그런데 마음한편에 작은 위안이라는 것이 생기는 건 있는 것 같다. 아무리 가족이여도 말 못할 고민이 있으며 아무리 친한 친구여도 말 못할 속사정은 있기 마련이다. 이런 이야기를 ‘신’에게 털어놔도 ‘신’은 친구들 처럼 입도 가볍지 않으며 영원한 비밀의 보장을 해준다. 신에 대한 이런 나의 생각은 모두 에게 다 똑같다고는 볼 수 없지만 내가 생각하는 신은 이런 것 같다.
아퀴나스의 주장을 모두 다 받아 들 일수는 없을 것이다. 아퀴나스의 주장에는 아직 불확실한 점이 많고 이런 신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상담을 하게 된다면 내담자 또한 신에 대한 확신을 어떻게 갖나요? 라고 되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을 조금 다르게 해서 신에 대한 무조건 적인 믿음이 아니라 신을 자신이 활용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내려보내 사람들이 예수를 이용하고 활용하게 하였다. 이처럼 신을 활용하는 것이다.
아퀴나스가 주장하는 신개념은 추상적 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번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살펴 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해라는 것은 관념적인 추상적 개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활동과 관찰로부터 형성되는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하며 그로인해 사람은 자기성찰이나 고립을 통해서라기 보다 타인과 함께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배운다고 말한다.
이런 말 처럼 사람은 활동과 경험을 통해 다른 사물들을 인식하며 배워나간다는 것이다. 자신혼자 마음수양을 하여 행복한 삶을 꾸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를 구성하며 삶의 균형을 맞춰가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는 것 같다. 이런 이론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동을 중요시 한다. “우리가 행하는 도덕적 덕들은 연습을 통해서 획득이 가능하다”라고 말하는데 타인에게 도움을 준 사람이 또 다시 그런 행동을 가능하다는 의미인 것 같다. 그리고 배운 사람 만이 또한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육의 역할도 중요하다고 하였다. 이런 이론적 개념들로 봤을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세상에 물러서지 말고 행동으로 부딪히며 배우고 타인과의 관계도 균형을 맞춰가며 살아나가는 것을 강조하는 것 같다.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이 있다. 행동의 중요성을 말하는 대표적 말이다. 나도 이 말에 많은 걸 느낀다. 자신이 먼가를 하고자 할 때 사람들은 너무나 앞을 내다보며 걱정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진행도 안되고 계속 더디게 하다보면 하려고 했던 일을 포기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행동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느낀다. “행복해지는 것은 덕망있게 되는 것이고, 헌신적이게 되는 것이며, 활동적이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활동성에서 찾고 있다. 무슨 뜻일까. 사람이 활동을 한다는건 그만큼 자신의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는 것이고 그 목표를 향해 활동을 하는 것이다. 사람을 파악하기 제일 좋은 방법은 그 사람의 행동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사람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를 잘 보다보면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것을 알 수 있데 된다. 그래서 사람은 어디를 가서나 행동 하나하나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 행동하나가 자신의 이미지를 결정 지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퀴나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비교해 보았다. 하나는 추상적인 ‘신’개념이였고 하나는 현실적인 방법인 행동에 관한 이론이였다. 서로 상반된 이론 일 수 있다. 보이지 않은 신을 믿으며 세상을 살아가는 것과 세상을 자신의 행동으로 만들어 나가는 삶 어느 것이 더 좋은 삶이라고는 당연히 말하기가 힘들다. 이런 두가지의 삶의 이론 말고 또 다른 삶의 이론이 많기 때문이다. 하루하루를 쾌락적으로 살거나 아니면 자신의 수양을 최선의 목적으로 삶을 사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담을 할때에는 내담자의 성격이나 가치관, 주위환경 등 상담을 하기 전 내담자에 대해 정확히 알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렇게 하지 않고 상담자가 원하는 삶의 가치관을 내담자에게 설명해 봤자. 내담자는 그 상담자의 상담 결과를 불신 할 것이며 더욱 더 어렵게만 만드는 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상담철학의 중요한 점은 여러 가지의 철학적인 상담이론을 어느 내담자에게 어떤식의 접근 방법으로 접근하냐가 중요한 것 같다. 이렇게 다양한 이론이 있는데 이 중에 하나를 정해서 그 이론이 최고의 방법인 것으로 설명하기 보단 내담자의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상담해 줄 수 있는 태도가 중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