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의 개화기 과정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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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한국과 일본의 개화기 과정 비교
일본의 개화기 과정
막말 (幕末 = ばくまつ) (1853 ~ 1867)
1. 근대화로의 태동기
1853년 우라가(浦賀) 앞바다에 페리가 이끄는 미국의 함대가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면서, 도쿠가와 막부(幕府)의 말기(末期)라는 격변의 시대에 접어든다. 이 시대는 에도시대를 마감하는 시기이자, 근대 서양의 제국주의적 왕정(王政)으로 이행하는 기반과 환경이 만들어진 시대이다.
막부는 끈질기게 개항을 거부하였으나 결국 미국의 강력한 개항요구에 밀려 1854년 카나가와에서 일미화친조약을 체결하고 시모다 항과 하코타테 항을 개항하였다. 이어 1858년 미국의 통상 요구에 다이로(大老) 이이나오스케가 조정의 허락도 없이 단독으로 일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해버렸다. 일미수호통상조약은 치외법권허용, 관세자주권 포기 등 상당히 불평등한 조약이었는데, 결국 이이나오스케는 존황양이론자들에게 암살 당하고 만다.
개항 이후 수출의 급증으로 일본 자국 내에서는 물자부족현상으로 물가가 급등하는 경제혼란이 일어났다. 이에 사쯔마와 초오슈우의 하급무사들이 존황양이운동을 일으키고 영국과 네덜란드, 프랑스, 미국 등의 열강의 함대들과 교전 상태에 들어갔으나 열강의 힘에 밀려 결국 양이를 포기하고 존황도막, 즉 막부를 타도하는 쪽으로 방향수정을 하였다. 사쯔마와 초오슈우는 삿초 동맹을 맺고 신정부 수립을 목표로 영국의 지원 하에 서양식 신식 군비를 정비하였다. 이에 막부도 프랑스의 원조를 받아 쵸오슈우를 정벌하는 등 치열한 대립상황에 빠진다. 여기에 폭동과 농민봉기까지 일어나 일본사회는 극도의 혼란상황에 이르게 되어 15대 쇼군 요시노부가 왕정복고를 선언하고 정권을 천황에게 반납했으나 신정부는 요시노부의 영지와 관위를 빼앗아 버렸다. 이로 인해 막부의 무사들이 교오토오에서 도바·후시미 전쟁을 일으켰고 결국 이 전재에서 신정부군이 승리하게 되었고 에도 막부의 시대는 끝나버렸다.
메이지(明治)시대 (1868 ~ 1912)
1868년 메이지 천황은 신 정부 정치방침인 5개조 선언문을 발표, 연호를 메이지로 정하고 1867년 쿄오토에서 토오쿄오로 천도하였다. 신 정부는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체계를 위해서 메이지유신을 단행하여 다이묘들의 영지와 영민을 천황에게 복속시키고 세금을 정부에서 받았으며, 모든 지방관을 중앙정부에서 파견하였다. 또한 사민평등을 선언하여 신분제를 폐지하였고 평민들도 성(姓)을 가질 수 있게 하였으며, 직업 선택과 거주이전의 자유를 주었다. 또한 부국강병책을 시행하여 정부가 직접 관영공장을 세우고 광산을 개발하는 등 근대산업의 발전을 추진하였으며 전신, 우편, 화폐, 철도 교통 등의 근대적인 제도개혁에도 힘썼다. 메이지 정부는 근대화를 위해 1873년 징병령을 내려 군대를 조직하고 1882년 일본은행을 설립하는 등 계속적으로 개혁에 힘썼다. 이어 개혁정치를 위한 자금마련에 나선 메이지 정부는 지조개정(地租改正)을 실시, 땅을 갖고 있는 만큼 현금으로 세금을 내게 하였다. 그러나 이 조세개혁은 여전히 소작인들 같은 빈농들에게는 불리한 것이었기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의 공장으로 향하였다. 이들은 일본 근대산업 발전을 위한 노동력이 되었고, 한편 일본 군대의 주요 병력이 되기도 했다.
1872년 메이지 정부는 근대적인 교육을 위해 학제를 개정, 모든 국민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는데 차츰 소학교교육이 확산되었다. 이후 토오쿄오의학교(現 토오쿄오대학), 게이오의숙, 토오쿄오전문학교(現 와세다대학) 등 고등교육기관도 속속 세워졌다. 이러한 메이지 정부의 서구화 정책은 태양력과 7요제도, 1일 24시간제, 단발과 양복, 기독교의 인정, 신문 간행 등 국민생활 전반에 걸쳐 그 영향력을 발휘하여, 이름하여 일본의 문명개화가 이루어졌다.
일본의 국민적 베스트셀러였던 학문을 권함의 작가, 후쿠자와 유키치 등에 의해 자유주의와 개인주의 등 근대 구미의 사상이 소개되면서 일본 전역은 자유와 평등, 인권주의 사상으로 물들게 되었다. 이에 헌법의 제정과 의회를 통한 정치를 주장하며 일본 최초의 정당인 자유당이 생겨났고(1881년),곧 이어 영국식 의회정치를 주장하는 입헌 개진당이 생겨났다. 결국 1889년 히토오 히로부미 등은 독일 헌법을 본뜬 대일본제국헌법을 공포하고 1890년 제국의회를 개설하였다. 이어 1890년 일본 최초의 중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선거권이 제한적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국민의 1%정도가 선거에 참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