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高宗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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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 고종[高宗]
▶ 조선 제26대 왕(18641907). 아명은 명복(命福), 초명은 재황(載 晃). 후에 희(熙)로 개명. 자는 성림(聖臨), 후에 명부(明夫)로 개자(改字). 호는 성헌(誠軒). 영조의 현손(玄孫)인 흥선군(興宣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아들로, 1852년 음력 7월 25일 정선방(貞善 坊) 소재의 흥선군 사제(私第)에서 출생하였다. 즉위 후인 66년 9월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니 이가 명성황후(明成皇后)이다.
▶ 고종이 익종의 대통을 계승하고 철종의 뒤를 이어 63년 즉위하게 된 것은 아버지 흥선군과 익종 비(翼宗妃)인 조대비(趙大妃)와의 묵계에 의해서였다. 철종이 죽자 조대비는 재빨리 흥선군의 둘째아들인 고종으로 하여금 익종의 대통을 계승하도록 지명하여 그를 익성군(翼成君)에 봉하고 관례를 거행하여 국왕에 즉위하게 하였다. 그러나 국왕이 12세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조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게 되었고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높여 국정을 총람, 대섭하게 하였다.
▶ 그후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으나 정권은 민비의 척족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민씨 척족정권은 흥선대원군이 취했던 강력한 척사양이정책(斥邪攘夷政策)과는 달리 개방정책을 펴서, 76년에는 일본과 수호조약을 맺고 구미 열강과도 차례로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화시책을 틈타 일본이 정치적경제적으로 침투해 오자, 신사척사상소운동(辛巳斥邪上疏運動)임오군란갑신정변동학농민혁명운동 등으로 개화수구 양파의 대립이 첨예하게 나타났다. 게다가 급격하게 변하는 동북아시아의 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해 열강의 이권다툼의 싸움터가 되어 청일전쟁러일전쟁이 일어났고, 민비시해사건이나 아관파천(俄館播遷)과 같은 민족의 자존심을 해치는 일까지 일어났다.
▶ 1897년 10월에 연호를 광무(光武)라 하고 대한제국의 수립을 선포하여 황제위에 올랐으나, 1907년 6월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한국의 문제를 호소하고자 특사 이상설(李相卨)이준(李儁)이위종을 보낸 일로, 이완용(李完用)송병준(宋秉畯) 등 일제에 아부하는 친일 매국대신들과 군사력을 동반한 일제의 강요로 한일협약을 위배한 책임을 지고 같은해 7월 20일 퇴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종의 뒤를 이어 순종이 즉위하였으며, 고종은 태황제(太皇帝)가 되었으나 실권이 없는 허위(虛位)였다. 1909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합방하자, 이태왕(李太王)으로 불리다가 19년 정월에 사망하였다. 이 때에 고종이 일본인에게 독살당했다는 풍문이 유포되어 민족의 의분을 자아냈으며, 인산례(因山禮)가 거행될 때 전국 각지에서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났다. 능은 홍릉(洪陵;金谷)이며, 저서로는 《주연집(珠淵集)》이 있다.
2. 교육 입국 조서(敎育立國詔書)
세계의 흐름을 두루 살펴보건대 국가의 부강은 오로지 국민의 지식이 개명하는 데서 비롯되고, 지식의 개명은 교육의 선미(善美)에 따라 이룩되는 것이니, 교육이야말로 국가보존의 근본인 바, 헛된 것을 물리치고 실용을 취하여 덕양(德養)과 체양(體養)과 지양(智養)을 교육의 3가 지 강기(綱紀)로 삼아, 널리 학교를 세우고 인재를 양성하여, 국민의 학식으로써 국가중흥의 대공(大功)을 세우게 하려 한다...그러므로 짐이 임금의 자리에서 교육의 책임을 맡노라. 교육은 그 길이 있어 헛된 이름과 실용(實用)을 먼저 분별해야 할 것이다. 헛이름을 물리치고 실용 (實用)을 취하도록 하라.
① 개화(開化)의 새 바람
19세기 말엽, 구미 각 국의 동점 정책에 의한 세력은 보수적인 극동 국가들을 침식하기에 이르렀다. 이 조류에 재빨리 편승한 일본은 보수 세력인 덕천막부(德川幕府)의 무신 정권을 무너뜨리고, 명치 유신을 단행하여 입헌 군주제로 개혁하고, 급속도로 체제를 정비한 뒤 대륙 진출의 야망을 품게 되었다.
여러 세기 동안, 중국 명.청의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했던 우리 나라에 물밀듯이 외세가 밀어닥치게 되었다. 이러한 주변 정세는 동양적인 완고성을 깨고, 문호를 개방할 수밖에 없도록 강요하였다. 그리하여, 1876년에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었고, 그에 따라 외국의 문물이 앞을 다투어 들어오게 되었다.
병자수호조약을 기점으로 하여 개화 운동이 적극적으로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청의 세력을 등에 업고 있던 보수적인 집권자인 수구파들은 개화 운동을 적극 반대하여 개화파 수구파의 정권 다툼이 치열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틈을 타서, 신흥 세력인 일본은 한반도에 그 마수(魔手)를 뻗치기 시작하여 노대국인 청의 세력과 자주 충돌하게 되어, 우리나라는 국제 세력의 난무장(亂舞場)이 되어 버렸다.
한편, 선각적(先覺的)인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번지는 개화 사상은 국내에 전파되는 천주교, 기독교의 영향으로 더욱 파급되어 갔다. 세계 각 국은 봉건의 낡은 굴레를 벗고 근대국가로 내닫고 있다. 이 새 바람은 굳게 닫고 있는 우리나라의 문을 세차게 두드리었다. 개화의 물결, 개명의 숨결은 서양 종교에 업혀 물밀듯 들어왔다.
1884년 12월 5일 개화당의 청년 정객들은 민 승호(閔升鎬) 일족을 중심으로 한 사대 보수당(事大保守黨)의 부패 정치에 불만을 품고, 우정국 낙성식(落成式)을 기하여 일분 공사와 모의하고 정변을 일으켰다. 이것이 갑신정변이다. 고종은 경우궁(景佑宮)으로 피난하고, 그 이튿날 개화당의 새 정부가 조직되었으나, 사대당의 요청으로 출병한 청군에 의하여 3일 천하에 그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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