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하운(韓何雲) - 시적 경향과 주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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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한하운(韓何雲)
1. 생애(1919-1975)
한하운은 1919년 2월 24일, 함경남도 함주군 동촌면 쌍봉리에서 한종규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태영(泰英)이었다. 그의 집안은 3대
가 과거에 급제한 권문세가로 그 지방의 지주였다. 이러한 그의 집안에서는
하운을 공부시키기 위해 1925년(7세) 함흥으로 이사하였다. 이듬해 그는 함
흥 제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줄곧 우등생이었으며, 음악과 미술에도 뛰
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1927년(9세) 봄, 몸이 붓기 시작해 아버지와 함
께 한 달 남짓 온천 등지를 다니며 요양생활을 한다.
그는 1932년(14세) 함흥 제일공립보통학교 6년 과정을 졸업하고 당시 명문 중학교였던 전북 이리(裡里) 농림학교 수의축산과에 입학하였다. 1934년(16세)무렵, 1학년 때부너 육상 선수로도 활약하였으며 외국 번역 소설을 읽기 시작했고 시나 소설을 습작하는 데 취미를 두었다. 이 당시 누이동생의 친구인 R을 만나 사랑에 빠졌는데 R은 한하운이 나병에 걸린 후에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훗날 한하운에게 있어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다. 1936년(18세) 몸 곳곳의 말초부에 콩알 같은 결절(結節)이 생기고 궤양이 끝없이 퍼져 나가서, 여기저기에서 진찰을 받다가 성대부속병원(현 서울대 부속병원)에서 나병으로 확정 진단을 받아 금강산으로 가서 요양 생활을 시작하였다. 병세가 호전되자 1937년(19세) 전북 이리농림학교를 졸업하고, 1939년(21세) 2월,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성계고등학교에 입학하였지만, 2년 후 병이 재발하면서 다시 금강산으로 가 치료에 전념했고, 1941년(23세) 북경대학 농학원 축목학계에 입학했다. 그 곳에서 S라는 여성을 만나 사랑을 나누었으나 그녀는 한하운이 나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별을 선언하고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1943년(25세) 라는 논문을 제출하고 졸업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환부는 겉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함흥으로 돌아온 한하운은 함경남도청 축산과에 취직을 하기도 했으나 병세가 심각해지면서 누가 봐도 나환자임을 알 수 있을 만큼 외모가 변형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외적 변형을 훗날 한하운은 ‘인간폐업령’이라 불렀다.
1945년(27세) 봄, 병세가 점점 악화되면서 약 900여개의 궤양이 온 몸에 퍼지고 얼굴까지 썩게 되자 한하운은 작은 방에 격리된 채 3년간 서적을 벗 삼아 살았다. 이때부터 문학에 귀의하지 않고는 스스로를 구원할 길이 없음을 깨닫고 시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공직을 사직하고 함흥시 중앙동으로 돌아오고, 본명 한태영을 한하운으로 개명하였다. 8.15 해방 이후 공산당으로부터 가산을 몰수당하여, 생계 수단으로 동생과 함께 노점에서 책장사를 하였다. 1946년(28세) ‘3·13 함흥학생사건’에 연루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으며, 그 해 여름 어머니께서 사망하였다. 이후로도 수차례 반동분자의 혐의로 투옥되었다. 1947년(29세) 5월 동생이 주도한 북한 전복사건으로 체포되어 원산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목숨을 걸고 탈옥하여 도보로 한 달 여에 걸쳐 도보로 월남하였다. 그리운 동생과 R을 만나기 위해 고달픈 유랑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그곳의 억압과 감시를 견디다 못해 다시 월남하여 전국 각지를 홀로 유랑하고 병고와 싸우면서 시작에 몰두하게 된다.
1949년(31세) 4월, ≪신천지≫에 ‘나시인 한하운 시초’란 제목으로 13편의 시작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데뷔하게 되며, 5월 시 26편을 묶어 정음사에서 첫시집 『한하운 시초』간행하였다. 그 후 1955년(37세) 제2시집 『보리 피리』를, 1956년(38세)에는 『한하운시선집』, 1957년(39세) 10월에 자서전 『나의 슬픈 반생기』를 인간사에서 간행하였다.
1959(41세)에 그의 나병이 음성으로 진단받아 사회에 복귀하고, 1960년(42세) 7월 ‘무하문화사’를 명동에 설립하여 문학지망생과 문우들이 많이 출입하였다. 이 때 자작시 해설집 『황토길』도 간행하였다.
위와 같은 문단활동 외에도, 그는 월남 후 자신의 투병 생활과 함께 1950년(32세) 성혜원, 1952년(34세) 신명보육원 등을 설립, 운영하였고, 1954년(36세) 대한 한센연맹위원장으로 취임하여 나환자 구제사업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67년(49세) 간경화증이 발병하여, 1975년(57세) 2월 28일 인천시 십정동에서 간경화증으로 사망하였다. 그 후, 1977년 유고시 외 19편이 ≪한국문학≫ 6월호에 발표되었다.
2. 시적 경향과 주요 작품
한하운의 전 시력(詩歷)을 세 단계로 나누어 그이 시작세계가 확산되고 변모되는 과정을 고찰하고자 한다. 한하운이 단지 문둥이 시인이 아니라, 한 시인으로서 자신 앞의 펼쳐질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자아와 세계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그의 삶은 행정(行程), 곧 그의 시작세계를 통시적 차원에서 몇 단계로 구분하여 살피기로 한다.
1) 초기 - 육신의 파편화와 슬픈 문둥이
나병은 얼굴과 손발에 분포하는 말신경·피부·에 침입하여 증세를 나타내는 병으로서 말신경에 병변(病變)이 생기면 피부의 지각이 없어지고, 땀이 나지 않고, 털이 빠지는 증세를 보인다. 한 나종이라는 혹이 생기며 때로는 내장에도 침입하는 무서운 병이다. 한하운은 이러한 병에 걸려 보편 삶을 살아가는 다수의 인간열에 끼지도 못하고 인간폐업을 하는 등의 참혹한 생활을 이어간다. 그래서 그의 시는 시인의 술 재능보다는 ‘나병환자’라는 개인의 숙명 비극에서 유래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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