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상(具常) 구상준에 대하여

 1  구상(具常) 구상준에 대하여-1
 2  구상(具常) 구상준에 대하여-2
 3  구상(具常) 구상준에 대하여-3
 4  구상(具常) 구상준에 대하여-4
 5  구상(具常) 구상준에 대하여-5
 6  구상(具常) 구상준에 대하여-6
 7  구상(具常) 구상준에 대하여-7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구상(具常) 구상준에 대하여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구상(具常) 구상준에 대하여
Ⅰ. 생애와 활동
구상은 1919년 9월 28일 서울 종로구 이화동에서 양반 가문 출신 아버지와 가톨릭 집안 어머니 사이의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네 살 때 북한 함경도 지구 선교를 맡게 된 독일계 가톨릭 성 베네딕도 수도원의 교육 사업을 위촉받은 아버지를 따라 원산시 근교인 덕원이라는 곳으로 가서 자라게 된다. 구상 시인은 열다섯에 가톨릭 신부가 되고자 베네딕도 수도원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3년 만에 환속을 하고, 일반 중학으로 진학했으나 퇴학당한다. 마을에서 주의자가 되었다는 낙인이 찍힌 구상 시인은 고향을 떠나 동경으로 가게 된다. 일본대학 종교과와 명치대학 문예과에 시험을 쳐 두 군데 모두 합격하였는데, 그 가운데 선택한 것이 종교과다. 그곳에서 그는 불교ㆍ기독교ㆍ가톨릭 등 각 종교의 철학적 근거를 배우며 자신의 정신적 근원을 다져 나간다. 일본에서의 공부를 마친 구상은 1942년 귀국했고 징용을 피하기 위해 원산에서 친일신문인 『북선매일』신문기자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지방지에 「예언」, 「수난의 장」, 「세레나데」등을 발표하였다.
광복 후 1946년에 북로당의 지시로 원산문학가동맹의 일원이 되어 교편을 잡던 중, 해방 기념 시집 발간에 작품을 내달라는 청탁을 받고 원산문학가 동맹의 동인지 시집 『응향』에 「밤」, 「여명도」, 「길」 등의 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응향필화사건 1946년 원산문학가동맹에서 간행한 최초의 동인시집 『응향』의 작품들에 대해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이 규탄 결정서를 내린 사건으로 “북조선 현실에 대한 회의적 공상적 퇴폐적 현실도피적 절망적 반동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으로 반동시인으로 규탄을 받고 1947년 월남한다. 같은 해 11월, 남한에서의 첫 번째 시작품 「발길에 채인 돌멩이와 어리석은 사나이와」를 『백민』에 발표함으로써 남한 문단에 정식으로 입성하게 된다.
그 후 구상은 『연합신문』 문화부장으로 역임하다 1950년 6ㆍ25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이 수복할 때까지 『승리일보』를 제작함과 동시에 육ㆍ해ㆍ공군의 종군작가단으로 활약한다. 이때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적 동족상잔의 참혹상과 이데올로기에 의한 분단의 현실을 직접 목도하고 경험한 사실을 시적 안목으로 형상화 한 것이 1965년 출간된 연작시 『초토(焦土)의 시(詩)』이다.
구상은 『승리일보』가 폐간되고, 1953년 『영남일보』의 주필 겸 편집국장을 맡았으나 이승만 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을 가하는 『민주고발』이라는 책자를 발간했던 일, 집단 데모에 앞장서며 정치집회 연사로 나선 일 등으로 조작된 ‘레이더사건 법률적 죄과가 없는 구상 시인을 잡아넣기 위해 그와 친한 재일교포 우한용이 연체동물 연구를 위해 진공관을 사다가 돈을 떼여 구상 시인이 찾아주었던 것을, 이적병기를 북한으로 밀송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조작한 사건. 검찰은 15년을 구형했으나, 최후 진술에서 “조국에 모반한 죄목을 쓰고 유기형수가 되느니보다 사형을 달라.”고 외쳤고, 다행히 무죄로 6개월여 만에 석방되었다.
’을 계기로 6개월간 옥중 생활을 한다.
그 후 『경향신문』, 『가톨릭신문』 등의 편집국장 및 논설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65년 일본 동경 교외 기요세 병원에서 두 차례의 폐수술을 받고 2년간의 요양을 하는데 요양 중 연작시 『밭일기』 100편을 대략 완성하고 1967년 4월 초까지 『주간 한국』에 13회에 걸쳐 101편을 연재한다.
1970년 하와이 대학교 극동어문학과 부교수로 가게 되고 하와이에서 생활 중 연작시 『강』을 준비한다. 같은 해 11월, 『현대시학』에 자전 연작시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의 게재를 시작하다가 1972년 9회로 집필을 중단한다. 1975년 서울 성 바오로 출판사에서 『구상 문학선』을 펴낸다. 1998년부터 흥사단 명예단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시를 비롯해 희곡과 시나리오수필 등의 작품 활동도 꾸준히 병행하다가 폐결핵으로 2004년 5월 85세로 별세하였다.
[참고] 구상의 연작시
연작시란 흔히 한 사람의 시인이 하나의 주제 아래 내용상 관련이 있는 시를 잇달아 쓴 것을 이르는 말이다. 구상은 스스로 “한국에서 연작시를 시도한 효시의 사람”이라고 자부한다. 1956년 『초토의 시』 15편을 시작으로 90년대까지 방대한 연작시 작업에 몰두했다. 구상은 「나는 왜 연작시를 쓰는가?」라는 글에서 자신이 연작시를 쓰게 된 연유를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