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사조론 고리오 영감 - 고리오 영감 작품 분석 - 고리오 영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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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문예사조론 고리오 영감 - 고리오 영감 작품 분석 - 고리오 영감에게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1. 작가와 작품
19세기 사실주의 소설의 문제작 오노레 드 발자크의 (박영근 옮김, 민음사)
오노레 드 발자크는 1799년 프랑스 투르 시에서 태어났다. 이 당시 52세의 아버지는 투르 사단의 군량부장이었고, 20세의 어머니는 파리의 부유한 살랑비에 가 출신이었다. 1804년 투르에 있는 르 게 학원에 입학하였고, 나중에 발자크는 이 무렵의 생활을 「골짜기의 백합」에서 묘사했다. 1807년 6월에 방돔 오라토리오 회(會) 중학교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6년 간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이때 기숙사의 규칙에 따라서 그 후 6년 간 한번도 집에 돌아가지 않고 도서실에 틀어박혀 신학, 역사, 자연 과학 등 많은 서적을 탐독했다.
1813년 4월 지나친 독서로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서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과 함께 1년가량 지냈고 파리에 있는 강세 학교에서 몇 달 간 기숙사 생활을 했다. 1816년 고등학교를 마치고 11월에 파리 대학 법학부에 등록, 소송 대리인 기요네 메르빌의 법률 사무소에서 견습 서기로 일했다. 한편 소르본 대학의 문학부에서 빌만, 기조, 쿠쟁 등의 강의를 청강했다.
1818년 3얼에 그곳을 떠나 그의 부모 친구이자 공증인인 빅토르 에두아르 파세 사무실로 옮기게 되면서 철학 서적을 많이 읽었고 「영혼 불멸에 관한 노트」를 집필했다. 1819년 1월 법학사 1차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문학계에서 이름을 떨치려고 법률 공부를 내던지고 파리의 하층민들이 사는 레디기에르 가 9번지에 있는 지붕 밑 다락방에 처박혀 작가수업에 전념했다. 이 당시의 생활상은 「파시노 칸느」와 「마법 가죽」에 묘사되기도 했다. 아르스날 도서관에서 고대와 중세의 의학과 철학에 관한 책을 읽었고 그 내용을 비교 분석 요약하면서 앞으로 작가로서의 토대를 다져 나갔다. 또한 이 시기에 고전 비극의 형식을 열심히 연구해서 9월 그 본보기로 5막의 운문 비극인 「크롬웰」을 쓰나 실패했다.
1820년 5월 가족 친지들 앞에서 「크롬웰」을 낭독하고, 8월 이 작품의 감정을 의뢰받은 아카데미 회원 프랑수아 앙드리외는 이라 조언했다. 하지만 기운을 잃지 않고 발자크는 그 뒤에 계속해서 글을 써나갔다. 1825년까지 많은 작품을 썼으나 소설에서 계속 실패했다. 발자크는 베르니 부인과 가까운 친척들에게 자금을 얻어 출판업에 착수했고, 몰리에르 및 라퐁텐의 축쇄판 전집을 출판했다. 한편 여동생 로르를 통해 다브란테스 공작 부인과 쥘마카로 부인과 교제를 시작했고, 「반느 클로르」가 익명으로 출간되었고 이 시기에 「결혼 생리학」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1829년 「결혼 생리학」을 출간해서 드디어 문학계의 총아로 떠올랐고, 비로소 살롱 출입이 시작되었다. 이 해6월 아버지가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1831년 줄곧 베르니 부인과 함께 지내다가 8월에 「마법 가죽」을 간행했다. 이 작품의 성공으로 문단에 확고한 지위를 얻게 되고, 국외에서는 제2의 괴테라는 칭찬을 받았다. 이때부터 평생동안 그의 고질병이 된 낭비벽이 시작되어 아파트를 마련하고 마부가 딸린 마차까지 구입하게 되었다.
이후 많은 귀족 부인들과 만나게 되고, 또한 많은 글들을 썼다. 1832년 2월 한스카 부인으로부터 최초의 편지를 받게 되었다. 1842년 1월 한스카 부인의 편지로 지난해 11월 남편 한스카 씨가 사망했다는 것을 알고 한스카 부인과의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4월에 「인간희극」의 간행을 개시했다. 1843년 건강이 나빠져 진단을 받은 결과 만성 뇌질환으로 판명이 났고, 이후로 건강이 계속 악화 되었다. 1850년 3월에 드디어 우크라이나의 베르디치에프에서 한스카 부인과 결혼하게 되었고, 병을 무릅쓰고 5월에 파리로 돌아왔고 8월 18일 파리 포르튀네 가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되었고, 빅토르 위고가 조사를 헌정했다.
이토록 발자크의 인생은 한편의 소설과도 같이 느껴진다. 발자크는 1833년쯤 자신이 직접 보고 경험한, 따라서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모든 것을 소설을 통해 완벽하게 그려내려는 큰 뜻을 품는다. , , 라는 세 계열에 137편의 소설을 채우려고 했으나 결국 91편만 가능했다.
발자크가 이토록 사회를 그려내는데 치중했듯이, 「고리오 영감」을 보면 그 당시의 사회생활, 풍속, 인간들의 개인적 모습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