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허(超虛) 김동명(金東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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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초허(超虛) 김동명(金東鳴)
1. 생애 및 활동 김용직(2002), 『한국현대시인연구』, 서울대출판부 p. 237~244
(1900년~1968년)
김동명(金東鳴)의 고향은 강원도 명주군 사천면 노동리이다. 경주 김씨의 수은공파로 부친은 김제옥, 모친은 평산 신씨다. 1900년 4월 4일 독자로 태어난 동명은 8세까지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극빈한 가정형편이라 고향에서 더 견디지 못하고 원산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는 강릉에서 한문을 익혔고, 원산에서 보통학교, 20세에는 함흥에서 영생중학을 졸업하였다. 다음해부터 흥남의 동진, 평남의 강남에서 소학교 교원을 하였는데 22세에는 시를 쓰던 친구 현인규(玄仁圭)에게서 보들레르(Baudelaire, C. P.)의 시집 『악의 꽃』을 빌려 읽고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1923년 『개벽(開闢)』지 10월호에 최초의 시 「당신이 만약 내게 門을 열어 주시면」을 발표했다. 그는 같은 해 「나는 보고 섰노라」, 「애닯은 記憶」, 「회의자들에게」, 「祈願」 등을 계속 발표하였다. 그의 작품발표는 1920년대 후반기와 1930년대 초에 더욱 활발히 전개되었다.
1928년 그는 도일하여 일본 청산학원 신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흥남에서 동광학원장을 지냈다. 그리고 1930년 등단 이후의 작품을 모아 첫 시집 『나의 거문고』를 내었고, 이후 1936년 두 번째 시집 『파초』 김동명(金東鳴)의 2번째 시집. 1938년 함흥 신성각(新聲閣) 간행. 이 시집의 구성은 모두 6부로 나뉘었는데, 「파초」에 9편, 「명상(瞑想)」에 5편, 「불놀이」에 18편, 「단장(短章)」에 2편, 「고별(告別)」에 8편, 「수난(受難)」에 5편으로 총 47편이 수록되었다. 대표작인 「파초」와 「내 마음은」도 이 시집에 수록되었다. 수록된 대부분의 작품들은 저자가 일제 말엽 탄압을 피하여 함남 서호진에 우거할 때 지은 것으로, 전원을 제재로 향수와 고독, 자연과의 친화, 생활의 단상 등이 주류를 이룬다. 이 시집은 신석정ㆍ김상용의 작품들과 함께 1930년대 후기의 전원시를 이해하는 데 기본 자료이다.
를 내었다. 1938년 동광학원을 그만두고 해방이 되기까지 숯장수와 나무장수로 저전하면서 치욕스런 일제 암흑기를 버티었다. 그리고 1942년 『술 노래』를 끝으로 붓을 꺾었다.
해방이 되자 흥남중학교장을 맡았고, 1946년에는 조만식이 이끄는 조선민주당 함경남도 위원장을 하였으나 공산당의 협박에 못 이겨 1947년 38선을 넘어 월남하였다.
동명은 사선을 넘어 월남한 그해 시집 『하늘』과 『三八선』을 내었다. 625를 거치고 1953년에 다시 다섯 번째의 시집 『진주만』을 내어 자유문학상을 수상했다.
한편 월남이후 이화여자대학교에 교수로 있으면서 1955년에는 정치현실을 예리하게 비판한 평론집 『적과 동지』를 내었다.
1957년에는 다시 여섯 번째의 시집 『목격자』를 출간했고, 다음해는 정치평론집 『역사의 배후에서』, 1959년에는 수필집 『세대의 삽화』를 계속 발표했으며, 1960년에는 참의원으로 의정에 나아갔다. 그러나 5.16군사정변으로 그 자리마저 잃은 후로는 정해진 수입 없이 정치 평론, 시, 수필 등 닥치는 대로 써서 생활을 꾸려 나갔다.
1965년 그의 생애와 예술을 정리한 『김동명문집』 3권을 내었다. 그리고 1968년 1월 20일 천주교에서 영세를 받고 다음날 타계하였다.
한국 현대시사에 있어 대표적인 전원파 전원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