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역관을 통해 바라본 조선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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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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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Ⅰ. 머리말
Ⅱ. 조선시대 초기의 역관과 무역
1. 조선시대 초기의 역관을 통해 본 사회상
2. 조선시대 초기의 교역형태
Ⅲ. 청 건국 이후의 역관의 성격 변화와 부의 축적
Ⅳ. 상인 계층의 대두
Ⅴ. 역관의 다양한 역할과 그 영향
Ⅵ. 맺음말
Ⅰ. 머리말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국제사회라 하여 모든 국가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상생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사회이다. 경제, 문화, 정치 등 각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과 경로를 통해 서로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고 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양한 활동은 공식정인 정부간 외교활동 및 대외무역활동과 민간 및 기업간 교류 등 모든 것을 망라하는 것으로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현대사회와 달리 조선시대에는 중화주의와 사대주의, 그리고 발달되지 못한 사회 수준 때문에 많은 나라와 교류하지 못하여 좁은 시각에 빠져있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의 의문점은 조선시대에는 현대에서 인터넷을 통해 세계가 하나처럼 동시에 통하듯이 다른 문화와 문물 등을 전해주는 그런 역할을 하는 존재는 없었던 것일까? 하는 것이다. 개인적 소견으로는 절대적인 수준은 지금에 미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당시 역관의 존재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반영한다면 의문의 대한 해답이 충분하리라 생각된다. 비록 당시 조선시대 사회적 한계가 있었음에도 역관은 출중한 외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외교사신과 국왕의 곁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문화와 문화 또는 나라와 나라를 잇는 중개자 역할을 하였다. 본래는 한 가지 역할에만 담당하였다고 할 수 있는 전문적 직업인이였으나 실상은 국제무역, 외교관, 첩보원, 무기수입상, 개화사상가 등 다양한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역관은 사회경제전반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어 조선시대 전체의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이러한 변화를 당시 시대상과 연관지어 역관의 활동을 통해 바라보고 그에 대한 역사적 의의와 평가를 해보고자 한다.
Ⅱ. 조선시대 초기의 역관과 무역
1. 조선시대 초기의 역관을 통해 본 사회상
조선시대의 역관의 사회적 지위에 앞서 최초의 역관과 역관이 생기게 된 배경을 알아본다면 앞으로 전개될 조선시대 역관에 대해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사회나 언어가 다르므로 서로 통교하기 위해서는 역관의 역할을 하는 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고구려백제는 모두 중국과 통교했고, 비록 필담으로 뜻을 통할 수 있었겠지만 모든 업무를 수행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우리가 잘 아는 최치원이 당나라의 과거시험에 급제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중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그와 같은 유학생들이 많이 존재했을 것이고 그 중 일부는 역관으로 삼았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삼국시대 때 역관을 두었다는 사료는 없다. 역관이 공식적으로 사료에 등장한 것은 고려 충렬왕 때 통문관을 설치했다는 기록이다. 당시 무엇보다 원과의 관계가 중요하였기 때문에 통문관이라는 기관을 설치해 몽고어와 중국어를 가르쳤다고 한다. 몽고어 구사 능력은 당시 신분상승의 지름길로 황제로부터의 조서, 칙서를 번역하면서 자연스럽게 국왕과 접대하는 시간이 많아져 그의 신임을 받아 출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 와서는 이러했던 역관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원명 교체기에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가 보다 중시한 것은 명나라와의 관계라는 것은 자명하다. 이는 고려시대에 권력과 부를 상징했던 몽고어가 지고 중국어가 뜨는 당시 국제질서의 변화를 예상할 수 있다. 태조실록2년 9월19일 조는 "사역원을 설치하고 중국어를 익히게 하였다."라고 기록하듯이 개국 이듬해 지금의 국립외국어 교육기관의 성격을 가진 사역원을 설치했다. 또한 역과 제도도 개국 초기에 다시 개정되어 몽고어와 중국어가 응시과목이였다. 조서초기의 역관들의 기본언어는 중국어와 몽고어였으나 후에 점점 조선의 외교관계가 넓어지면서 모두 6개국어 즉, 중국어, 몽고어, 만주어, 일어, 위구르어, 유구어로 확대되어 간다. 그렇다고 사역원을 들어간다고 해서 모두 역관이 되는 것은 아니였다. 3년마다 시행되는 잡과에 통과하여야 비로소 역관을 될 수 있었다. 조선시대가 신분사회였다고는 하나 조선시대 초기에는 사대부와 중인을 구별하지 않았으므로 역관 중에는 고위직으로 진출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예종 무렵 역관들이 고위직에 나가는 것에 대한 문신들의 반발이 시작된다. 이는 지배층 내부의 계급분화가 덜 되었던 예전과 달리 왕권의 약화와 계급분화가 정도가 심해져 신하들의 입김이 세졌다고 할 수 있다. 문신들은 역관을 당상관, 즉 고위관직에 이름을 올리면 조정의 권위가 추락할까 두렵다하였고 여기에 농본상말의 사대부적 사상이 짙게 나타나 있다. 이때부터 문과를 급제한 것과 잡과에 급제한 것에 대한 차이가 분명해졌다고 할 수 있겠고 중인인 역관들의 한계가 잘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역관들의 고위직 진출을 반대하고 상업을 천시했던 사대부들의 이중적 성격을 보자면 그 꼴이 우습기까지 하다. 사대부들은 사대부들이 역관들이 사오는 명나라 물품의 주 소비계층이면서도 국제무역으로 이득을 취한다고 역관들은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의 모습도 현실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정치인들의 태도는 시대구분이 없이 늘 자신이 하면 되고 남이하면 안된다는 식이니 대대로 정치인의 피는 계보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러한 조선시대의 명분과 실제과의 차이는 훗날 커다란 장애가 될 것이란 걸 쉽게 짐작가능하다.
2. 조선시대 초기의 교역형태
조선시대의 기본적인 외교정책은 사대교린이였다. 사대교린이란 명나라는 상국으로서 사대하고 이웃의 일본여진 등과는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명과의 사대외교였다. 사대외교의 경제적인 표현이 조공무역이였으며, 조공무역이 바로 명과의 공무역이였다. 조공무역을 일각에서는 사대주의라고 비판하지만 조선으로서는 조공이라는 명분으로 실리를 챙기는 실리외교였다. 왜냐면 조공의 원칙은 조공이 있으면 사여(賜與)가 있다는 것으로 조공국에서 조공을 바치면 사대국에서는 사여를 내린다는 뜻이다. 보통 사여품이 조공품보다 더 많은 것이 일반적이였으므로 우리가 생각했었듯 조공이라는 것이 꼭 손해보는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상국은 상국으로서 황제국으로서 체면과 품위 유지비 정도로 생각하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