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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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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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목차
1. 19790년대의 두 얼굴
2.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참상
3. 바보회와 근로기준법
4.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5. 이후, 노동운동의 활성화
1. 1970년대의 두 얼굴
박정희 정권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경제 성장 정책을 추진한 결과 상당한 정도로 양적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부 주도의 성장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함에 따른 부작용과 폐단도 매우 컸다. 일부 재벌에게 국가의 경제력이 편중되고, 빈부의 차가 벌어지면서 사회계층간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또 막대한 외채 및 외국자본의 도입과 수출 위주의 산업 생산으로 경제 전반의 대외 종속성이 갈수록 심해지는 병폐를 낳았다. 노동자들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도 불구하고 최저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임금을 받는 희생을 일방적으로 강요당하면서 열악한 작업 환경으로 말미암은 산업 재해의 빈발 속에서 일해야만 했다. 1970년 7월 7일에 개통된 경부고속도로는 전화의 잿더미 속에서 들고일어난 이른바 ‘한강의 기적’을 상징하며, 그해 11월 13일에 일어난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 자실은 그 ‘기적’의 이면에 숨은 잔인한 인권유린을 상징한다.
2.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참상
전태일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재단사라는 이름의 청년노동자. 1948년 8월 26일 대구에서 태어나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시장 앞 길거리에서 스물둘의 젊음으로 몸을 불살라 죽었다. 그의 죽음을 사람들은 ‘인간 선언’이라고 부른다.
은 1965년 17세의 나이로 평화시장 내 삼일사에 견습공(시다)으로 취직을 하였다. 미싱일에 경험이 있었던 전태일은 남달리 빨리 기술을 익혀 곧 미싱 보조가 되었으며 가을에는 평화시장 뒷골목의 통일사에서 어린아이들의 막바지를 만드는 미싱사로 취직하였다. 그러나 평화시장의 지옥과 같은 처참한 노동현실이 가슴을 압박해 왔으며 평화시장의 노동참상에 대해 억울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노동 시간은 작업량이 비교적 많은 기간(가을, 겨울, 봄)은 보통 아침 8시 반 출근에 밤11시 퇴근으로 하루 평균 14~15시간이었다. 일거리가 밀릴 때에는 물론 야간작업을 하는 일도 허다하며, 심한 경우는 사흘씩 연거푸 밤낮으로 일하는 경우도 있었다. 업주들이 어린 시다들에게 잠 안 오는 약을 먹이거나 주사를 놓아가며 밤일을 시켰던 것이다.
미싱사의 손가락 끝은 살갗이 닳고 닳아서 지문이 없었다. 자크를 달 때에는 둘째와 셋째 손가락 끝이 빨개져서 누르면 피가 솟아 나왔다. 하루의 일을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어지럼증이 나고, 장딴지가 띵띵 붓고 몸 구석구석이 쑥쑥 아리게 되며, 힘이 빠져서 걸음을 걷기가 힘들었다.
임금 지불제도를 보면 미싱사, 미싱보조, 견습공의 경우 대부분이 정액 월급제가 아니라 작업량에 따라 지불되는 도급제 였다. 따라서 견습공과 미싱보조의 임금은 업주가 직접 지불하지 않고 미싱사가 지불하게 되는데 이것은 근로기준법상의 임금 지불원칙에 위배되는 것으로서 이에 의하여 견습공과 보조공의 저임금이 합리화 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