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농민전쟁의 발원지 정읍 갑오농민전쟁 갑오농민전쟁문화유적 전봉준장군 동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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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갑오농민전쟁의 발원지 정읍 갑오농민전쟁 갑오농민전쟁문화유적 전봉준장군 동학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한국근현대사 관련 문화유적 조사 및 답사
갑오농민전쟁의 발원지 ‘정읍’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사전조사)
- 동학농민혁명은 봉건사회의 부정과 부패로부터 농민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저항했던 대규모 민중항쟁이다. 1894년 1월 고부봉기를 거쳐 같은 해 3월 전라도 무장에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군은 전주성을 점령하고 전라도 전역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혁명을 실천해 나갔다. 그리고 일본이 청일전쟁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하자 9월부터 다시 전국적인 항쟁을 전개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게 된 정치, 사회, 경제적 배경은 첫째로 세금제도의 파행적 운영을 말할 수 있다. 조선에는 삼정(三政), 곧 전정, 군정, 환곡이라는 세 가지 세목이 있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집권층의 무능과 부패로 삼정은 농민의 등을 휘게하는 온갖 불법 세금의 온상이 되었다. 두 번째로 정치권력층의 무능과 부패를 말하자면 19세기 말 권력을 쥔 여흥 민씨 외척들은 나라의 재정을 자기 돈 쓰듯이 하였고 관직을 제 맘대로 팔아넘겼다. 돈으로 관직을 산 자들은 부임하는 날부터 아전들과 한통속이 되어 농민들을 가혹하게 수탈하기 시작했고, 이에 뒤질세라 지주들도 소작인들에게 규정 이상의 소작료를 받아 챙겼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로는 열강의 경제적 침탈이 심하였는데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은 주로 쌀, 콩, 금 등 농수산물과 귀금속 등을 수출하였고 외국산 면포와 생필품 등을 수입하였다. 외국의 값싼 생필품 앞에 조선의 농업 수공업은 힘쓸 겨를이 없었고, 또 조선의 영세한 상인들은 청과 일본상인의 막대한 자본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이처럼 19세기 말 조선의 농민들은 통치질서의 파탄과 열강의 침탈로 엄청난 고통 속에 살았다. 그러나 그럴수록 조선 전역에는 사회변혁의 물결이 일고 있었고, 물결은 차츰 거센 파도가 되어 1894년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동학의 사회개혁 사상, 즉 동학사상은 수운 최제우에 의하여 제시된 민중종교사상이다. 19세기 후반 한국사회는 안으로 봉건적인 왕조체제의 모순으로 농민들의 고통을 덜어줄 체제변혁의 요구가 커졌으며, 밖으로는 서양열강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지켜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때 동학은 사람은 곧 하늘이라는 인간 평등사상과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후천개벽사상을 바탕으로 지배세력으로 부터 부당한 수탈을 당하고 있었던 농민들에게 사회 변혁의 희망을 주었다. 변혁을 지향하는 동학사상의 이러한 측면은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에서 농민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사발통문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전 혁명을 결의한 문서이다. 1893년 11월 전봉준, 송두호, 송대화 , 송국섭 , 최경선, 김도삼, 손여옥 등 20명은 송두호의 집에 모여 고부군수 조병갑을 효수하고 전주성을 거쳐 서울로 바로 쳐들어가자는 어마어마한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누가 주모자인지 모르게 사발을 엎어 놀고 돌아가며 서명을 하고 믿을 수 있는 동지들에게 그 사실을 통지하였는데 이 때문에 사발통문이라 불린다. 1968년 12월 4일 주산마을(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옛날에는 대뫼마을) 송후섭의 집에서 발견된 뒤 그 뜻을 기리고자 다음 해 12월1일 주산마을 입구에 동학혁명모의탑을 세워 사발통문을 그 탑 아래 묻었다. 그 뒤 사발통문의 진위여부를 확인하고자 1970년 3월 4일에 탑을 해체함으로써 다시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갑오농민전쟁의 전개과정 - 전라도는 곡창지대로서 예부터 정부와 수령의 탐학이 심한 곳이었다. 개항 이후에는 쌀 수출과 관련하여 일본상인의 침탈도 다른 지역에 비하여 컸다.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은 만석보의 수세를 강제 징수하는 등 온갖 탐학을 자행하였다. 이에 농민들은 전봉준을 중심으로 여러 차례 시정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결국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농민들은 10일정도 군아를 점령하였으나 신임군수 박원명의 간청에 따라 해산하였다.
고부민란의 보고에 접한 봉건정부는 전하도 장흥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파견하여 사태의 수습을 꾀하였다. 동신에 1894년 3월 21일에는 전라도 감사 김문현을 감봉삼등의 벌에 처하고, 조병갑은 군수의 지위를 박탈하여 의금부에 구금하는 등 회유책을 취했다. 이로써 일시적으로 가라앉은 듯했던 고부민한은 사태수습을 위해 파견된 안핵사 이용태에 의해 다시 촉진되었다. 그는 이 사건을 동학교도의 소행으로만 돌리고 그들을 색출하는 데 급급하여 농민들을 격분하게 만들었다.
전봉준은 농민들과 1894년 4월 하순 전라 각지에 봉기를 촉구하는 통문을 돌려 조직적인 항거에 나섰다. 봉기한 농민들은 백산으로 집결하였고, 농민군들은 4개 강령을 발표하였다. 이로써 농민봉기는 지방 분산적인 민란의 한계를 넘어 농민전쟁으로 전환하였다. 5월 11일 황토현 전투에서 농민군 최초의 개가를 올렸다. 농민군은 당일 정읍으로 진출하였고, 다음날 12일에는 흥덕, 고창을 석권하였다. 5월13일에는 무장현에 돌입했고, 이어서 17일에 영광까지 차례로 점령했다. 여기서 남하하던 농민군은 함평과 무안 그리고 나주를 거쳐 다시 북상했다. 장성에 진출한 농민군 4000명은 장성군 황룡면 월평리 황룡촌에서 양호초토사 홍계훈이 이끄는 정부군과 격돌하여 승리했다. 승리한 농민군은 바로 전라도의 중심인 전주로 향해 진격을 시작했다. 정부와 농민군은 외세의 개입 없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894년 6월 11일 전주화약을 맺었다. 이는 정부 측이 농민군 측이 제기한 폐정개혁안을 받아들여 성립되었다. 이후 일본군의 궁궐점령에 분노한 농민군은 이해 10월 척왜를 구호로 재봉기 하였다.
전라도 농민군 10만여 명이 전주 북쪽 삼례에 집결하였고, 충청도 농민군 10만여 명이 논산에서 합류했다. 그러나 전라도 농민군 중 손화중과 최경선이 이끄는 군대는 일본군의 상륙에 대비하여 나주에 주둔하였다. 이렇듯 농민군이 분산되었던 것은 하나의 약점이었다. 어쨌든 이들에 합류한 농민군은 공주남쪽 우금치에서 일본군 및 정부군과 격돌하였다. 공주는 충청도의 수부로서 정치의 중심지일 뿐 아니라 서울로 북상하는 길목으로 군사적으로도 요충지였다. 공주의 방위 병력은 일본 정예군 약 1000여 명에 정부군 1만 여명이었다. 농민군은 11월 19일부터 공주를 공격하기 시작하여 22일에는 최정정에 이르렀다. 수십 차례의 격전이 약 일주일에 걸쳐 벌어졌으나 결국 근대식 군사훈련과 무기체계를 가지고 있던 일본군에 농민군은 패배하고 말았다. 농민군은 주력군이 패배한 이후로도 계속 투쟁하다가 마지막 장흥 석대들 전투에서 패전함으로써 갑오농민전쟁의 막은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