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민중항쟁 사상과 한국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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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광주 민중항쟁 사상과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광주 민중항쟁 사상과
한국 민주주의
1960년대, 민주를 꿈꾸기 시작하다 전남대학교 518기념관에서 발췌.
419혁명
1960년 419혁명은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 및 장기집권 음모에 맞서 민주주의를 회복시킨 우리나라 최초의 시민 혁명이다. 혁명에 참여한 전남대생들 중에서는 15명이 중경상을 입었고 37명이 군경에 연행되었다. 혁명 후 전남대생들은 민주화 결의안을 채택하였고, 교수들도 각 단과대학별로 학원 민주화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한일협정 반대(63사태) 시위
1961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165년 12월 대한민국에 불리한 내용의 한일협정 비준서를 교환하여 한일국교를 정상화했다. 그러나 대학생과 야당은 1964년부터 1965년 협정이 체결된 후까지 굴욕적인 한일협정체결 반대 및 무효화를 주장하는 대규모 시위를 전개했다. 이에 정부는 계엄령과 휴교 등 물리적 조치로 대응하였고 전남대에서는 1964년과 1965년 두 해에 걸쳐 이홍길(사학 61) 외 30여 명의 학생들이 징계를 받았다.
3선개헌과 장기집권 음모 저지 투쟁
박정희 정권은 1969년 국회에서 장기집권 음모의 일환으로 3선개헌안을 변칙 통과시켰다. 1971년에는 대학 통제정책으로 교련교육을 강요하였고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부정을 저질렀다. 대학가는 박정희 정권에 맞서 독재투쟁을 전개했다. 박정희 정권은 학생들의 저항에 1971년 전남대학교를 비롯한 8개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다. 이 일련의 사태로 33명의 전남대생들이 학사징계를 받았다.
지 발간
1971년 10월 13일 전남대에서는 대학을 병영화 하려는 박정희 정권 타도를 주장하는 최초의 지하신문 ‘녹두’지가 발행되었다.
‘겨울공화국’ 유신체제에 저항하다.
유신체제의 병영화 된 대학
박정희 정권은 1972년 10월 17일 유신체제를 선포하였다. 유신체제는 대통령 1인에게 권력을 집중시켜 영구집권을 가능하게 한 민주주의의 완전한 부정이었다. 언론의 자유는 억압받았으며, 대학은 반복되는 위수령과 긴급조치, 휴교령 등으로 황폐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