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시인 조사] 김지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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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김지하론
1. 생애와 활동
1941년 2월 4일, 아버지 김맹모와 어머니 정금성 사이의 외아들로 전라남도 목포시 대안동18번지에서 태어난다. 본명은 김영일(金英一)이며 김지하(金芝河)는 필명이다. . 아홉 살의 어린 김지하의 눈에 비친 625의 체험은 다음과 같았다. 내 시의 어머니 굽이굽이 한이 얽힌 저 핏빛 황토의 언덕들, 사잣밥을 주워 잡수시던 할머니의 갈퀴 같은 손, 굶어 죽은 내 조카 진국이의 시체를 묻으려 뻘밭에 이마를 짓찧으시던 외할아버지의 통곡, 대창을 휘두르며 비녀산을 내려오던 뚜쟁이의 그 핏덩어리 같은 두 눈, 생매장 당한 아버지를 찾기 위해 캄캄한 밤, 송장들마다 들치며 소리 죽여 울던 창남이의 모습.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고 1953년 목포중학교에 입학했다가 1954년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제2의 고향이 될 원주로 이사하고 1956년에는 서울 중동고등학교에 입학한다. 당시 서울에 넘쳐흐르는 외국 문화의 흡수에 몰두하여 모더니즘적인 것을 쫓아다니다 초현실주의적인 딜런 토머스에 매료되고 한 여선생이 준 서정시집을 계기로 김소월, 김영랑, 서정주 등의 시를 외우고 다니며, 시작(詩作)에 손을 댄다. 1959년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입학하고 이후 여러 뛰어난 친구들과 사귀고 부패한 현실에 관심을 갖게 된다.
1963년 3월, 목포문학 제 2호에 처음으로 라는 시 한편을 김지하라는 이름으로 발표한다. 같은 해 12월 박정희가 대통령에 취임하던 즈음, 그는 조동일, 심우성 등이 주도한 ‘우리문화연구회’와 ‘영화연구반’ 그리고 연극반 등에서 활동하며, 훗날 ‘오적(五賊) 계열’시의 바탕이 될 판소리, 탈춤 등의 전통문화에 대한 소양을 얻는다.
1964년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에서 시행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의 조사를 쓴다. 또한 . 한일국교정상화회담이 본격화된 1964년부터 한일기본조약이 조인된 65년까지 학생과 야당을 주축으로 전개된 투쟁. 64년 6월 3일에 절정을 이뤄 이라고도 한다.
굴욕외교반대투쟁의 서울대 가두진출 책임을 맡는다. 비상계엄령의 선포와 함께 투옥되어 4개월 동안 감옥 생활의 첫 경험을 하게 된다. 이후 1969년 11월 시인 조태일이 주재하던 시인지에 4편의 시를 발표함으로서 공식적으로 문단에 얼굴을 내민다. 1970년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에 장시 을 발표하고 반공법 위반이란 죄목으로 체포·투옥 당한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김지하란 이름이 일약 세계에 알려진다. 12월에는 첫 시집 황토가 한얼에서 발간된다.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의 결성에 참가하고 원주로 내려가 지학순 주교가 이끄는 천주교구 농촌협동운동의 기획위원에 취임하여 원주교구에서 민주회복운동에 노력한다. 부활절에 이영섭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 신자가 된다. 1972년 가톨릭계 종합지 창조에 권력의 횡포와 민심의 방향을 이야기해주는 판소리 투의 장시 를 발표하고 반공법 위반으로 입건되어 마산국립결핵요양원에 강제 연금된다. 1973년 4월 명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입회 아래 소설가 박경리 여사의 외동딸 김영주와 결혼한다.
1974년 박정희 정권의 대통령 긴급조치 제1·2·3호가 발령되고 4월 서울대 문리생들을 주축으로 한 . 1974년 4월에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 공산주의적 인민혁명’을 시도한다고 하여 학생과 사회 인사들을 처벌했던 사건. 1973년 8월 김대중(金大中)납치사건으로 인하여 반(反)유신체제운동이 대학생 등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박정희 정권의 인권탄압을 규탄하면서 개헌서명운동을 벌인다. 1974년 1월 8일 박정희는 긴급조치 1ㆍ2호를 공포하고 일체의 개헌논의를 금지하고, 위반자를 처벌하기 위해 비상 군법회의를 설치한다. 4월 3일 박정희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은 불법단체로 공산당 불순세력의 조종을 받고 있다’고 발표하면서 긴급조치 제4호를 발동한다. 이 사건으로 사형 8명과 무기징역 9명, 징역 12년 이상 20명 등 관련자 대부분이 중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진위(眞) 여부를 둘러싸고 국내외적으로 문제가 되었다.
‘민청학련’사건이 일어난다. 이때 김지하는 긴급조치 4호의 발령과 함께 지명 수배되고 대흑산도 예리에서 체포된다. 7월 비상보통군법회의로부터 긴급조치 4호 및 국가보안법 위반, 그리고 내란선동죄 등의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는다. 그러자 일본을 중심으로 김지하의 석방을 돕기 위한 국제적인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한다. 그 후 1975년 2월, 김지하는 10개월 만에 출옥한다. 출옥 후 ‘민청학련’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한국의 민중과 일본의 민중이 함께 반독재 공동전선을 펼 것을 제안하는 ‘반독재 한·일 연대투쟁 선언’을 발표하고 1975년 3월 다시 체포 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그 해 6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는 제3세계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로터스상 특별상’을 김지하에게 수여하기로 결정하는 한편, 석방요청서를 박정희에게 발송한다. 이 시기에 일본, 미국, 유럽 등의 작가와 지식인들에 의해 1975년 노벨문학상과 평화상 후보로도 추천받는다. 1979년 . 일명 1026사건 -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경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安家)에서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金載圭)가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한 사건. 이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다.
박정희가 암살당하고 1980년 광주항쟁이 일어나고 그 해 1980년 9월 김지하는 형 집행정지로 석방된다.
1981년 ‘세계시인대회’가 주는 ‘위대한 시인상’을 수상하고 오스트리아의 ‘크라이스키 인권상’을 수상한다. 이후 1982년, 약 12년 만에 창작과 비평에서 타는 목마름으로를 간행하고, 1984년 같은 출판사에서 대설(大說)-남(南)을 간행하는 등 1970년대의 저작들을 발표하였다. 이 무렵을 전후해 최제우(崔濟愚)·최시형(崔時亨)·강일순(姜一淳) 등의 민중사상에 독자적 해석을 더해 생명사상이라 이름하고 생명운동에 뛰어들었는데, 이때 변혁운동 진영으로부터 변절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이 당시의 시집으로 《애린》(1986.실천문학사), 《검은 산 하얀 방》(1986.분도출판사)과 최제우의 삶과 죽음을 담은 장시집《이 가문 날에 비구름》(1988.동광출판사), 서정시집 《별밭을 우러르며》(1989.동광출판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