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봉건사회의 계층 귀족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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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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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중세 봉건사회의 계층 - 귀족과 기사
- 프랑스의 봉건시대( 귀족들의 변화상) -
프랑스는 애초에 소규모였던 왕령지와 함께 약 30여개의 제후령, 약 1000개의 성채와 부속 지배령이 중세 성기 프랑스의 정치적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성주들은 원래 카롤링 왕조의 백권에서 유래된 금지권으로 성주령을 다스리면서, 통행세를 거두고 주민들에게 성의 축조 및 보수를 위한 부역과 기타의 잡역을 과했다. 이른바 봉건시대 제 1기(1000~1160)는 이들 성주들의 광범한 자립성이 두드러지고, 봉건시대 제 2기 (1160~1240)는 대규모의 제후령 및 봉건 왕정으로의 이행이 두드러진다. 12세기경부터 최우선 신종선서(여러 봉신을 모시는 것)와 특유의 봉토 상속법으로 인하여 다수의 군소 봉토가 대규모의 제후령으로 집중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들 제휴령은 다시금 서서히 국왕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고위귀족의 도태가 진행되어 마침내 15세기경에는 왕실의 왕자들이 사여 받은 대규모의 왕자령을 제외하면 자립적인 거대한 제후 가문의 수가 미미한 수준으로 감소되었고 남아있는 소수의 대귀족들 마저도 국왕의 측근으로서 기능하였다. 이미 12세기경부터 귀족들의 군사적 기능도 감퇴하여 왕은 군사력의 큰 비중을 더욱 더 용병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따라서 기존의 봉건 귀족은 왕에게 봉건군역 대신에 화폐를 비롯한 각종 부담(방패세)을 납부하게 되었다. 마침내 15세기 중엽부터 귀족은 국왕의 군대에 편성되어 자신의 부장 역량에 따라 봉급을 받는 존재로까지 약화되기에 이르렀다. 귀족 세력이 서서히 약화된 배경에는 중세 후기의 경제변동이 작용하고 있었다. 이미 11세기부터 귀족령의 세분화 추세에 제동을 가하는 수단이 강구되어 차남이하의 귀족 자제가 십자군을 비롯한 군사원정에 참여하거나, 사도 수도회와 같은 개혁수도회에 투신하는 바와 같은 탈출구를 구하게 되었다. 12세기경부터 증대하는 화폐유통과 화폐가치의 하락으로 고정된 지대에 의존하고 있던 귀족의 수입도 점차 감소하게 되었다. 이에 반하여 무장, 말, 마상시합 등 신분과 체면의 유지를 위한 물품구입과 사치활동으로 귀족의 지출은 더욱 늘어가고 있었다. 중세 말기의 농업위기(이에 따라 농민 공동체의 저항이 일어남)로 귀족의 빈곤화는 더욱 격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귀족들에게 남겨진 활로는 국왕에 대한 봉사였다. 몰락하는 귀족들이 나오는 한편 부유한 부르주아와 법률가들 중에서는 상승하는 자도 나왔다. 이들은 11세기부터 프랑스 왕들이 발부하는 귀족증서를 통해서, 또는 귀족가문과의 혼인을 통해서, 또는 영지의 매입을 통해 장기간에 걸쳐 귀족층에 편입되었다. 프랑스에서는 국왕이 성공적으로 왕권을 강화해가면서 귀족에 대해서는 더욱 강한 통제력을 발휘했다.
- 기사(=대부분 귀족)들의 일상생활 -
기사는 전쟁터에 나가거나 봉건영주와 함께 여행을 떠날 때 이외에는 성에서 일상생활을 누리며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침에는 잠자리에 일어나지 않은 채 침대에서 그대로 아침기도를 드렸다. 항상 아침을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마감했다. 기사는 농노나 도시 시민과는 달리 청결을 매우 중요시 하였다. 청결을 유지하는 것은 부를 상징하는 것인 동시에 지저분한 농민과 자신을 구별하는 방법이었다. 식사는 매일 아침 미사를 드리고 나서 9시쯤에 한번, 그리고 늦은 오후에 한번을 했다. 기사가 여행을 떠나지 않고 한동안 성에 머물고 있을 때는 아침식사를 성대하게 차려 먹었다. 기사가 출정을 나갈 때는 대개 빵만 먹지만, 집에서는 아침식사를 고기와 소스를 곁들인 빵과 포도주를 먹었다. 오후 3~6경 두 번째 식사를 하였다. 농부들은 주로 곡물을 먹었지만, 부유한 기사들은 먹는 음식이 매우 다채로웠다. 식사를 마치고 나면 기사는 오락을 즐겼다. 방랑시인이 들러서 온갖 재능을 발휘하고 하였다. 이들은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거나 흥행사를 겸한 시인이었다. 기사의 일상생활은 낮에만 집중되어 있었고, 밤에는 성안에 정적만이 감돌았다. 대개의 경우 성주와 그의 가족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일찍 일어났다. 중세시대에는 조명으로 실내는 밝히는데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일출과 일몰에 따라 하루의 생활이 정해졌다.
< 기사들은 식사예절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
-기사문화의 형성-
11세기와 12세기 초의 기사는 점잖거나 세련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기사들은 거의 매일 술을 퍼마셨다. 장기를 두다가 상대방 때문에 애가 타면 상대방을 때리고 하인이 포도주를 늦게 가져오면 하인에게 창을 던졌다. 아내가 그의 행동을 거슬리게 하면 아내를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중세 중기에도 기사는 여전히 거칠고 사나웠다. 십자군 전쟁이후에 유럽의 기사계급을 한데 묶어 공동으로 추구하는 이상향을 수립할 수 있었다. 기사는 동방, 즉 동로마 제국의 예의 바른 궁중 생활방식을 배워 그리스교 세계를 품위 있게 전달하고자 했다. 기사 정신은 십자군전쟁으로 점점 더 그리스도교적인 색채가 짙어졌다. 그들은 약자를 보호하고 신에 대한 믿음을 지키겠다는 표시로 칼을 봉헌했다. 기사들은 자기 자신을 이상향으로 여기면서 변함없는 마음가짐과 절제하는 자세를 매우 중시했다. 기사의 덕목( 고아, 과부 등의 약자를 보호한다는 것과 용맹성과 신의를 지키려는 충성심을 가지는 것)에는 내면적인 것뿐만 아니라 전투에서 드러나는 외면적인 것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 기사(=봉건영주, 귀족으로 성장)들의 오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