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직론 - 작가의 생애와 활동 & 일본어 학습과 조선어로 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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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한직론 - 작가의 생애와 활동 & 일본어 학습과 조선어로 시쓰기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이 한 직 론
1. 작가의 생애와 활동
율아당(慄雅堂) 19세기 프랑스 상징파 작가 빌리에 드 릴아당의 이름을 한자로 음역하여 율아당(慄雅堂)이라는 아호를 지었다는 김종길의 증언을 바탕으로 이형기는 이한직의 호에서 세속적인 타협을 거부하는 정신적 귀족주의적 경향을 읽어내고 있다. 강영미, "이한직의 시의식 연구", 정신문화연구2008 여름호 제31권 제2호 p.224
이한직은 1921년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아현리(지금의 서울 아현동)에서 이진호의 2남 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진호는 한말에 평안도 관찰사를 지냈고 일제 때는 중추원 참의와 경북지사, 그리고 총독부의 학무국장을 지낸 거물 친일파다. 식민지 시대, 총독부의 국장직에 임했던 조선인은 단 두 명이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이한직의 아버지 이진호였다. 그는 총독부 학무국장으로 재임할 당시, 아들을 조선인 고등보통학교보다 시설이 좋은 공립심상소학교에 보내기 위해 경성부청에 별도의 기부금을 냈다. 그 결과 이한직은 일본인들만 다니던 남산심상소학교에 입학하여 지도자를 만드는 데 역점을 둔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조선인으로서는 드물게 일본인들과 함께 일본어로 된 제도교육을 받으며 성장하게 된 것이다. 이후 경성중학교(지금의 서울고교)에 입학하게 된다. 이 경력은 필시 그를 귀족주의자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말로 시를 써, 경성중학을 졸업하고 일본의 게이오대학에 입학한 1939년 봄, 《문장》에 정지용의 추천으로 발표한다.
우리말을 배울 기회가 없었던 그가 우리말로 시를 썼다는 점은 크게 주목할 대목이다. 대학 재학 중 학병으로 나갔다가 해방 후에 귀국하지만, 친일파의 아들이라는 도형수의 낙인이 찍힌 그로서는 조국의 해방을 단순히 기쁨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1950년에는 당시 부통령이던 김성수의 딸 김상현과 결혼하는데, 이 결혼은 축복받은 것이 되지 못했다. 친일파의 아들과의 결혼을 반대한 김성수는 피난지 부산에서 있은 딸의 결혼식에 참석조차 하지 않았고, 이후 이들의 신혼 생활은 가난에 시달린다. 1960년에는 4·19이후 성립한 장면(張勉)정부의 주일문정관으로 도일하지만, 5·16 쿠데타를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한동안 입국 정지를 당한다. 1976년 일본에서 타계한다.
이 이력만 가지고 보면 그의 문단 생활은 36년, 문정관으로 도일한 이후의 기간을 빼고도 20년이나 된다. 그러나 그가 남긴 시집은 유시집으로 《이한직 시집》(문리사,1976) 단 한 권. 여기 실려 있는 시도 겨우 21편뿐이다. 그 2년 뒤에 일본에서 나온 일문판에 두 편의 시가 추가되었으니, 1939년 열아홉 살의 어린 나이로 시단에 나와 1976년 쉰여섯 살에 타계하기까지 그가 쓴 시는 모두 23편이 되는 셈이다. 문단 활동을 전혀 안 했느냐 하면, 적어도 문정관으로 도일하기 이전까지는 그렇지도 않다. 해방 직후 청년문학가협의회의 창립에도 적극적으로 참여 했으며, 6·25 중에는 문인으로 종군하여 공군 소속 창공구락부의 멤버로 활약했고, 그 뒤 한국시인협회를 만드는 데도 주도적 역할을 했다. 또한 오영진, 박남수 등이 주재하던 《문학예술》에 조지훈과 함께 시 추천을 맡아 많은 신인을 배출하기도 했다.
2. 주요작품 및 작품경향
1939년 18세의 나이로, 김종한과 함께 《문장》지를 통해 추천 완료되어 당시 시단의 각광을 받았던 이한직의 데뷔 당시 시세계는 추천자인 정지용에 의해 “젊고도 슬프고 어리고도 미소할 만한 기지를 갖춘 당신의 시가 바로 현대시의 매력일가 합니다”라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또한 이한직은 당대 비평계에서 큰 화제로 오르내리던 이른바 의 논의 속에서 김동리에 의해 “신비적 회화적 경향의 시인”으로 분류되었으며, 그 시세계는 “개성과 생명의 고양에 근거를 둔 시세계라고 평가된 바 있다. 이한직은 현재까지 그가 남긴 시조차 그 전모가 온전하게 파악되지 않은 실정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20여년에 걸친 시단활동에도 불구하고 그가 시를 산발적으로 발표했을 뿐만 아니라 1961년 주일 문정관으로 도일하면서부터 문필활동을 중단하여 국내 평단의 관심사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1) 일본어 학습과 조선어로 시쓰기
이한직(1921~1976)12)이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제도 교육을 받을 당시 국어는 일본어였고 조선어는 수의과목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조선인들이 다니던 학교에서도 교수 용어는 조선어가 아닌 일본어였다. 특이한 점은 제도 교육을 통해 일본어를 배운 이한직이 조선어로 시를 써서 ≪문장≫에 투고한 점이다. 당시 ≪문장≫은 조선어 문학의 보루 역할을 한 민족적 성향의 잡지였다. 이한직 시집의 발문을 보면, 이한직이 어머님과 행랑아범에게서 조선어를 배웠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는 어머니가 상징하는 집안에서 개인적으로 조선어를 익히며 시를 쓰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조선어를 익힘으로써 자신의 내면을 표현할 매체를 마련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가 상징하는 현실 세계에 안주할 수도 없고, 아버지가 마련한 물적 토대에서 벗어날 수도 없었던 이한직은 외계와는 다른 가상의 세계가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정하고 싶은 외부 세계를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매개이자 외부세계에서 상처받은 내면을 치유하는 매체로서의 가상의 세계가 필요했던 것이다. 실재 현실에는 없으나 자신이 소망하는 진정한 세계의 상이 어떤 것인지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가상의 세계로서 이한직은 시쓰기를 선택한 것이다. 이한직이 오로지 조선어만으로 시를 썼다는 것은 일제로 상징되는 식민지 현실, 아버지로 상징되는 현실 세계에 대해 거리를 두고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에게 일본어는 일제의 통치 논리, 아버지로 상징되는 현실원리, 거스를 수 없는 외부 세계를 뜻하고 조선어는 식민지 현실에 대한 거리두기, 어머니로 상징되는 내면세계, 현실을 벗어나려는 초월의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한직은 아버지/어머니, 학교/가정, 일본어/조선어, 바깥세상/내면 사이에서 부침하는 자신을 반성하는 매개로써 조선어를 택했고, 부정적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자신의 순결한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 시를 쓴 것으로 보인다.
2) ‘온실’속의 시 쓰기와 자아 보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