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사문학의 이해 문혁이후의 중국 상혼문학과 반사문학의 출현 상혼 문학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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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반사문학의 이해 문혁이후의 중국 상혼문학과 반사문학의 출현 상혼 문학 한계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반사문학의 이해
1. 문혁이후의 중국
1976년 10월 四人幇이 체포되고, 1977년 당주석 華國鋒이 문화대혁명의 종결을 선언하면서 10년에 걸친 문혁이 막을 내렸다. 78년 12월에는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가 열렸으며 이를 통해서 사상, 노선, 정책, 인사 등을 전면 개정하게 된다. 문혁이 가져다준 정체를 극복하기 위해 ‘사회주의 현대화 사회 건설’을 구호로 내세웠으며 반우파투쟁 이후 문혁기간에 숙청되었던 당원로들과 문화계, 학계 인사들의 명예를 회복, 복권시키게 된다. 또한 민주, 법치, 인권을 요구하는 민주 민권운동 또한 거세게 일어난다. 81년 6월에는 제11기 제 6중전회가 열려 鄧小平은 를 통하여 건국이래 30년간의 사회주의 혁명을 총결산하고 문혁 10년 기간에 대해서 ‘문혁에 의해 당과 인민은 최대의 좌절과 손실을 입었으며 큰 재난을 가져다 준 내란이었다’고 평가를 했다. 이후 鄧小平을 필두로한 개혁파는 四個現代化 계획을 발표하고 사회주의 정치체제에 시장경제 원리를 도입하는 등 경제재건에 주력하게 된다.
2. 상흔문학과 반사문학의 출현
문혁의 종결과 더불어 문예계도 다시 활기를 되찾게 된다. 문혁시기에 제기되었던 문예정책은 폐기 되었으며 비판받았던 인사들은 명예를 회복하게 되고 문혁기간에 폐쇄되었던 협회들은 활동을 재개한다고 선언하였다. 제11기 3중전회가 열린 후 문예계 또한 현대화 실천조항을 만들어 쌍백방침 관철, 實事求是, 사상해방, 극좌노선 시정 등을 발표하였다. 이후 문예계는 있어서 교조주의와 개인숭배라는 교조주의와 개인숭배라는 질곡에서 빠져나오게 되었고, 문예가 정치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규율에서도 벗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77년과 78년, 과 등이 발표되며 문혁시기에 받게된 상처와 아픔을 토로하고 문혁을 고발하는 상흔문학이 나타나게 되었다. 상흔문학은 문혁의 아픔을 겪은 독자들에게 아픈상처를 드러내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장을 제공하였다. 하지만 상흔문학은 문혁에 대한 비판과 공감대 확보를 통해 문학의 재생을 이루어 내었으나 자신은 문혁의 피해자일 뿐이라는 의식, 원인에 대한 고찰 부족 등의 한계를 가진다. 79년에는 魯彦周의 ‘天雲山傳奇’를 시작으로 반사문학이 등장하게 된다. 반사문학은 이러한 상흔문학의 한계를 극복하는 좀 더 성숙된 형태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3. 상흔 문학의 한계
1) 문혁에 대한 책임의 회피와 범위의 제한
상흔 문학은 문혁기간 동안 고통스런 체험과 상처를 표현하며 독자로 하여금 공감을 하게 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이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라는 확신속에서 문혁을 고발하여 자신은 책임이 없다는 모습을 보이며 문혁을 모택동과 사인방 일파의 책임으로만 돌리고 있다. 도한 고발의 범위도 개인적인 비극이라는 제한된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2) 문혁의 원인에 대한 고민 부족
문혁이 발생한 계기는 정치적인 것이었지만 10년간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의 역사적, 문화적 요소도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상흔 문학에는 이러한 사고나 고민이 결여되어있다. 또한 문혁을 중국 현대사 전체 속에 놓고 원인을 규명하는 부분이 부족하다.
3) 수동적인 인간관
상흔문학에 등장하는 인물은 대체로 사인방과 일파들에게만 책임을 묻고 있으며 사인방을 몰아낸후 당에 복종하며 조국의 현대화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으로 다짐을 하곤 한다. 이는 문혁을 겪은 이후에도 사람들이 여전히 맹목적이고 수동적이라는 모습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