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읽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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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읽고 나서
이 책을 보면 우선 이덕일은 성리학의 대가, 조선조 최고의 학자, 송자라고도 불리는 송시열을 두고 조선 전체와 한국사가 낳은 비극이라고 대담하게 말한다. 비록 나는 조선사에 대해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중, 고등학교 국사시간에 배운 지식만으로 내 머릿속 조선은 참으로 바보 같고 부끄러운 역사이다. 이런 조선사에서 내가 유일하게 관심을 표명하고 인정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건 바로 조선의 학문적 성과와 정치 체제다.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가 플라톤이 늘 말하던 철인정치가 실행된 나라는 역사상 조선이 아마 유일하고 또 가장 잘 실현되었을 것이다. 학자이자 사상가이자 철학가였던 사대부가 곧 관료로서 학문과 국가를 지배했던 나라가 바로 조선이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도 많은 변화가 생겨 여러 부처에 담당 전문가가 관료로 나가는 일이 종종 있지만 대학 교수가 전부 나서서 국가를 이끌어나간다면 어떻겠는가? 약간 웃음이 나오지 않겠나 싶다. 하지만 실제 조선이라는 나라는 그러한 체제로 운영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조선의 뛰어난 학문적 성과와 정치 체제 속에서 반드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이 송시열이다.
조선 정치사에서 중요한 부분이 바로 붕당이라고 생각한다. 선조 시기에 이르러 조정의 인사권을 담당하는 이조전랑이라는 자리를 두고 붕당이 갈라지고 이때 동인과 서인으로 불리는 붕당이 형성되었다. 이후 동인이 우세한 위치에 서게 되지만 곧 북인과 남인으로 분열되고 조일전쟁이 끝날 때 까지도 북인, 남인, 서인 세 당파가 정치적으로 대립 혹은 협력하면서 조선을 이끌어 나가게 된다. 하지만 조일전쟁 이후 광해군이 소북파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고 국정이 흔들리자 서인은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게 된다.
바로 이 서인의 총수가 송시열이며 서인과 남인이 100여년간 공존하며 조선을 좌지우지하는 동안 조선의 사대주의는 그 도를 더해갔다고 생각한다. 인조 시대 때 조선의 임금이 적장에게 치욕적인 항복 의식을 거행한 역사, 바로 삼전도의 굴욕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진 것일까? 이미 조일전쟁으로 전쟁의 폐해를 뼈저리게 느낀 조선이 어째서 청나라의 1, 2차 침입에 무방비였던 것일까. 인조 즉위와 서인 집권 이후에 전개되는 역사적 사건들이 송시열과 과연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송시열은 뛰어난 유학자요, 대철학가였다. 하지만 과연 그게 다일까? 서인 정권이 국정을 좌지우지하면서 반대파를 조용히, 지속적으로 억누르며 존속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상기해야 할 것이다.
송시열은 대표적인 북벌론자였다. 효종의 노신, 효종때의 신하라는 접두어가 항상 따라붙을 정도로 그는 효종 시대 때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 인물이다. 효종의 북벌은 조선의 꺼져가는 마지막 불빛을 불태우듯 활활 타올랐고 우리는 후세에 그런 북벌 의지를 기리며 조선의 저력을 확인하곤 한다. 하지만 과연 그게 전부일까? 아니다. 북벌을 주장하고, 효종의 의지에 더불어 북벌을 실행한 실권자가 바로 송시열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으면 안 된다. 효종이 적극적으로, 일생일대의 숙원으로 북벌을 여겨 실천했다면 송시열은 반청복명의 기치 아래 약간의 노력으로 대내외적인 명분만 얻으면 된다는 식의 가식적이고 소극적인 자세로 북벌을 대했던 것이다. 애초에 공통의 목적을 갖고 추진한 국가적 프로젝트였지만 나아가는 방향이 점차 틀어지자 양자간에 이견이 생기고 마찰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 와중에 효종이 급사하게 된다. 강력한 의지로 북벌을 주장해 그것을 실행에 옮겨 하나둘씩 결실을 맺고 신하들의 무수히 많던 반대 의견도 간단히 압도해 버릴 정도의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던 조선 제일의 권력자가 갑자기 이유없이, 몇가지 의혹만 남긴 채 죽어버린 것이었다.
조선의 왕들은 굉장히 많은 수가 독살의 의혹을 안고 사망하였다. 왕권의 강약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물론 효종의 경우도 피해갈 수 없는 의혹을 품고 있다. 효종이 죽음으로써 그가 평생의 사업으로 추진하던 북벌의 불꽃은 사그라든다.
이후 서인의 장기 집권은 날이 갈수록 더해진다. 효종의 모후인 조대비의 복제 문제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대립했던 것이다. 실제 남인이 주장하는 3년설이 맞지만 서인은 1년설을 주장한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주는지 생각해보자. 이미 조선 사회는 왕이라는 최고 집권자의 존재보다는 정치적인 입지, 실리에 의해 당의 운명이 좌지우지되며 그 당을 위해서 활동하는 것이 요구된 고도의 정치적 실체에 입각한 사회였던 것이다. 이것이 내가 앞서 얘기했던 조선 사회의 뛰어난 정치 체제다. 기실 절대군주제를 표방한 나라에서 이처럼 오늘날 민주주의에서나 볼 수 있는 정당 정치가 실현된 나라가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철인정치의 결과물인 셈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속칭 예송논쟁이라고 불리는 이 논쟁이 애초에 서인의 송시열과 남인의 윤후 사이의 학문적인 논쟁에 불과했었는데 점점 두 사람이 속한 당쟁의 당론으로 대변되면서 문제가 변질/확대된 것이다. 거기다가 효종의 비 인선왕후가 죽자 이번에는 서인측에서 3년설을 주장하는 것이다. 예송논쟁이 더 이상 학문적 논쟁이 아니라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송시열이라는 인물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역사적 사실들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