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문 내 이름은 칸을 보고 나서

 1  영화 감상문 내 이름은 칸을 보고 나서-1
 2  영화 감상문 내 이름은 칸을 보고 나서-2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영화 감상문 내 이름은 칸을 보고 나서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내 이름은 칸을 보고 나서
2년 전 이 영화를 처음 보았다. 한 교수님께서 추천해주신 영화였는데 그 때에는 ‘종교’라는 개념에 초점을 맞추어서 감상하고 많은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지금 이 영화를 다시 보았다. 이미 봤던 것이었지만 그 때와는 달리 눈에 보이지 않았던 부분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장애’라는 개념에 집중해서 보니 저번보다 더 심오해지고 마음속에 많은 울림이 생겼다. 처음 장면부터 끝 장면까지 주인공의 ‘장애’에 대한 묘사가 자세히 드러나 있었는데 그것을 보면서 놓쳤던 부분을 더 알 수 있었고, 느껴지는 감동이 전보다 배가 되었던 것 같다. 특히 주인공의 어머니와 주인공의 아내, 이 두 여인에 대한 생각이 변했는데 예전에는 ‘어머니이고 아내이니깐 당연히 저렇게 해야지.’라는 생각을 했던 반면 지금 문득 든 생각은 ‘직접 장애인을 대해보고 의식의 변화가 없는 한 그런 소명의식을 가질 수가 없고, 그들과 함께할 때의 행동 하나하나가 다를 수밖에 없겠구나.’이었다. 그들은 ‘장애’를 가진 주인공에게 대하는 태도가 대부분의 사람과는 달리 특별했고, 그의 교육과 생활을 책임지면서 주인공이 밝은 모습으로 성장할 수 있는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교육자로서 장애를 가진 사람을 이해하고, 또한 그들에게 좋은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직접 대화도 해보고 곁에 있으면서 느끼는 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올해 4월, 복지관에 봉사활동을 갔다 온 이후인데 자폐성 장애를 가진 여성분과 길을 동행하게 되었다. 둘이서 이런저런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버스도 같이 타면서 2시간을 함께 있는 동안 내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기존의 장애인을 대하는 내 모습은 동정심이었고, ‘도움’이라는 의미에 가까웠다면 그 시간에는 동반자를 대하는 느낌, 친구와 산책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그녀 옆에 있으면서 우리에게 보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는데 내가 처음에 가졌던 동정심으로부터 나오는 눈빛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시선이 이 영화의 주인공을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눈빛과 동일한 것 같다.
주인공인 칸(Khan)이 미국의 대통령을 만나러 공항에 가게 되는데 그곳의 보안경찰들과 칸의 앞에 있던 여인의 눈빛이 수상한 자를 보는 듯했다. 특히 보안경찰들은 용의자를 수색하듯이 칸을 함부로 대하는 처음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 뭔가 자신들이 장애인들보다 우월하다는 착각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가? 솔직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장애인을 만났을 때 자기 자신이 ‘비장애인’임을 느끼면서 감사해하고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걸어주거나 친구가 되려고 하질 않는다. 그리고 나도 그러하다. 하지만 이 수업을 듣고, 직접 장애인을 만나고, 언젠가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느끼면서 생각의 틀을 넓히고,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을 해 본다.
칸은 아스퍼거 증후군을 가지고 있고 이는 자폐와 함께 발달장애에 속한다. 아스퍼거 증후군, 위키백과.
실제로 복지관에서 만났던 자폐성 장애를 가진 여성분의 행동, 말투와 칸의 모습이 일치되는 부분이 많았고 혼잣말을 하거나 말을 돌려서 하지 못하는 등 언어적인 측면에서 비슷한 상황을 보였다. 그녀와 대화를 했을 때 알아듣지 못한 말이 반 이상이었고 반복해서 들어야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대화를 이어가지 못했을 때 당황한 적도 있고 그녀가 큰 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줄 때에는 옆을 지나가던 행인들이 한 번씩은 쳐다보고 가기도 했다. 그 때 아마도 ‘아, 그들이 장애인을 바라보는 것처럼 나도 그랬었구나.’ 이런 생각이 들면서 내가 가진 이원론적인 흑백논리가 깨졌던 것 같다. 그리고 나중에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어떻게 지도할 것이며 어떤 모습으로 그들을 대할 것인지에 대한 성찰도 해보았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 장애가 있던 친구들과 같은 반이 된 적이 있다. 초등학교 때에는 부분적인 통합교육이 이루어졌고 중학교 때는 완전 통합교육이 이루어졌는데 모두 좋지 못한 결과만 보게 되었다. 그 아이들이 학교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자퇴를 한 것이다. 그리고 올해 봄에 복지관에서 만난 그 여성분도 학교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학교라고 하면 선생님이 체벌을 가하는 모습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길옆의 학교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이런 상황들만 접한 나는 통합교육에 대한 회의감만이 가득 차 있었고 이 수업을 절반 들을 때까지 통합교육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생각이 바뀐 까닭은 복지관에 다녀온 후 끝없이 생각을 해본 결과였다. 대체 왜 나는 바람직한 통합교육 현장을 보지 못한 것일까. 그것은 같은 반의 친구들과 담임선생님의 태도 때문이었다. 장애 아이에 대해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혼자 알아서 잘 하겠지.’라는 생각, 책임감이 없는 모습이 문제였던 것이다. 즉, 내가 지금까지 실패한 통합교육만을 본 이유는 나를 포함한 주변 모든 사람들의 부족한 책임의식 때문이었다. 그래서 통합교육 현장에 서 있을 때 나는 전의 모습과는 달라야하고, 같은 반 친구들의 생각도 달라지도록 충분히 이야기해야하며 반 전체가 책임감을 가지고 장애 아이와 함께 모두를 위한 학급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표가 생겼다.
칸은 아스퍼거 증후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이큐 168을 가진 천재였다. 많은 사람들이 아이큐 168이라는 말을 들으면 천재라고 환호하면서 장애가 있다고 말을 더하게 되면 바로 외면해버리고 마는 것이 현실이다. 인간을 ‘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만 나누지 말고, ‘장애인’을 ‘비장애인’ 아래에 두지 말아야 한다. 칸의 어머니가 그에게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만 있어. 좋은 행동을 하는 좋은 사람, 그리고 나쁜 행동을 하는 나쁜 사람. 하는 행동이 다를 뿐 다른 차이점은 없단다.”라고 하면서 어린 칸에게 ‘장애’에 대한 차별의식을 없애주고 모두 다 똑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영화에서는 ‘어떤 학교에서도 배울 수 없는’ 교육이라고 표현했지만 실제로는 학교에서 가르쳐야 하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교사가 부모의 마음으로 장애를 가진 학생을 가르친다면 가장 바람직하고 이상적인 통합교육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