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르노 미학과 그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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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아도르노 미학과 그 해석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아도르노 미학과 그 해석
미학이 답하고자 하는 것에는 많은 것들이 있을 수 있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어떻게 아름다움을 느끼는가, 어떤 시스템으로 인간은 예술을 산출하는가, 예술은 본질적으로 무엇인가... 하지만 내가 가장 원하는 답은 어떤 것이 예술인가? 라는 극히 단순하고 현실적인 질문이다. 인간은 이미 원시의 동굴에서부터 예술 행위를 해 왔으며, 지금까지도 수많은 방식으로 예술을 해 오고 있다. 하지만 예술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라고 확정지을 수 있는 것인가?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확정짓고자 하는 시도가 강할수록 예술의 본질을 흐릴 것이다. 아도르노가 부정변증법 강의에서 말했듯 개념화는 개념화하는 대상들의 특수와 개별을 사상(捨象)함으로서 그 본질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며, 또 개념화 과정에서 개념화하고자 하는 것 이외의 것들마저 본질인 양 끌어안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적 개념화에 따라 최근류와 종차로서 예술을 나타낸다면 예술은 팔다리가 없는 불구처럼 보일 것이고, 기형적으로 머리가 두셋 더 달린 괴물이 될 것이다. 맑시즘적인 사회예술만을 강조하거나 칸트적인 순수 미적 예술만을 강조할 때 반대의 측면은 사상될 것이고, 이 두 가지 측면 뿐 만 아니라 예술에는 수많은 측면들이 존재하기에 그 모든 것을 나타내기에 개념화는 너무나 폭력적이다. 개념화의 문제 중 후자의 측면인 불청객적 대상마저 개념화 작업이 포섭하는 경우는 이를테면, ‘대중 예술’이 포함되는 경우의 것이 대표적일 것이다.
예술이라는 것의 개념화 작업을 제쳐둔다 해도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이미 알고 있다 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가족 유사성 개념을 가져와서 예술에 대해 이러이러한 것들 정도라고 말 할 수는 있다는 점에 있어서 그렇다. 우리는 예술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는다. 학교와 학원 등지의 선생이라 불리는 지식주입 청부업자들처럼 답을 말하라고 옥죄면서 강요한다 해도 예술이 무엇인가라는 답변은 나오지 않겠지만 이미 무엇인가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다. 먼저 예술에 있어 시공을 초월한 절대적 미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부에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한, 또한 인간을 위한 진리와 같은 것은 숨어 있을 지언 정 어떤 완성된 미적 진리는 없다. 이는 인식론에서의 맥락주의와도 어느 정도 길을 같이 한다. 어떤 맥락에서 그것이 표현되었는가가 예술이 예술일 수 있는가의 여부와 매우 큰 연관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여기서 예술에 대한 판단이 확장된다. 어떤 특정한 상황 뿐 만 아니라 시대라는 맥락으로까지 범위를 확장 할 수 있다는 것이며, 여기서 나아가 예술이라 불리는 객체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달라진다는 이 면은, 또한 예술이라는 개념 자체가 시대에 따라 끝없이 변화하는 것이라는 것이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예술을 판단하는 것은 그 시대와 상황 위에 서서 판단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대 위에서 예술을 보는 데,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인가? 그 시대에 가장 잘 팔리는 것이 예술인가? 그 시대의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것이 예술인가? 아니면 그 반대? 안 팔리거나 소수 특권층의 전유물 같은 것인가? 이에 대한 답변은 원시의 예술이 어떤 방식으로 시작되었는가에 대해 되돌아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구석기의 원시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이었다. 흔히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두 가지로 ‘생명’과 ‘자유’를 꼽지만 자유라는 개념은 모순적으로 억압받을 때에야 대두되는 개념이고, 아도르노의 말에 따르면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자 하는 시스템을 만든 후, 그 시스템이 인간을 억압하기 시작했을 때’ 대두된다고 볼 수 있다. 자유는 그렇기에 자연 지배의 시스템이 만들어 낸 억압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대두한 것으로, 억압과 자유는 모순을 지니고 있는 변증법적 관계로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물론 생명 역시 자연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언젠가 찾아오는 엔트로피적 상태인 ‘죽음’과 함께하는 모순을 내포한 변증법적 관계일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기 시작하는 그 시대 이전의 인간은 결국 ‘그 어떤 것보다 우선시되고 전제되어야 할’ 생명이라는 가치, 생존이라는 가치에 모든 것을 쏟아 붇는다. 여기서 예술은 생존과 동떨어진 어떠한 것이 아닌 생존 그 자체이다. 대상을 정확하게 표현할수록 생존율은 상승한다. 즉, 예술의 출발은 인류 최고의 가치에 대한 추구, 즉 생존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생존이 아닌 것일까? 위에서 언급해 보았듯 예술은 시대 위에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는 예술을 어떤 고고한 것, 삶과 동떨어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하지만 표면적인 그러한 인식을 벗어나 우리가 어떤 세계에 발을 딛고 서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도르노의 말에 따르면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 만든 시스템은 이제 인간을 지배하여, 이제 절대적 위치를 가지게 된 인간의 도구적 이성-헤겔에게 있어서는 오성이라고 할 수 있는-이 인간을 지배하게 되는 상황에 놓인다. 도구적 이성이 신화시대에서부터 대두하며 자연을 지배할 때, 인간은 인간에게 지배당하며 억압당한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서부터 자유라는 것을 추구하게 되는 모순을 가진다. 그리고 이제 이 자유라는 것이 인간에게 가지는 위치는 생명과 동등한 위치에 오르게 된다. 지금도 우리는 생명을 위해 자유를 포기하며 살아가지만, 또한 자유를 위해, 자신 뿐 만 아니라 헤겔의 생각에 따르면 타인과 함께이기에 존재하는, 너와 나, 우리를 위한 그런 자유를 위해 생명을 포기하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들은 우리에게 칭송받곤 하지 않는가. 그렇다. 자유와 생명은 이제 인간에게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최상의 가치가 되었다. 우리는 자연을 지배하면서 생명 유지의 가능성은 극대화되었지만 그 대가로 인간에 의해 억압당하게 되고, 생명만큼이나 자유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가 놓인 세계이고 시대이다.
이제 이 억압의 시대에 발을 딛고 살펴보자. 우리는 인간에게 있어 거의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 두 가지 가치를 추구하게 된다. 이는 거의 필연적인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자유를 추구하는 것과 생명을 추구하는 것, 이 두 가지의 가치를 우리는 추구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자연 지배 능력은 계속해서 발전하지만 여전히 자연의 위협은 위축되었을지언정 강력하다. 여전히 생명이라는 가치의 추구는 포기할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 욕망이다. 공학, 의학, 상학, 농학 등이 바로 이런 ‘생명’을 추구하는 대표적인 학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억압이라는 시스템 아래 자유의 추구 역시 인간의 새로운 욕망으로 대두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자유를 추구하는 학문이 있는 것은 인간에게 필연적인 귀결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예술과 철학이라고 말하고 싶다.
예술은 원시의 발생의 순간부터 생명이라는, 인간 최고의 가치를 위한 시도였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는 자유라는 가치로 돌아 선 것이라고 말하며 예술의 가치추구의 본질이 변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실은 예술의 목적은 변하지 않았다. 그 어떤 것보다 우선시되어야 할 가치에 대한 추구라는 점에 있어서는 예술의 목적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술은 탄생 이래로 인간의 최고 가치를 위한 것, 특히 본질을 꿰뚫고 직관적으로 인간에게 다가와 내면의 심층에서 이미 인간의 최상의 가치를 실현시키며, 외부의 세계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원동력이라 할 것이다. 자유와 생명이 더 이상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최상의 가치가 된 지금, 예술은 자유를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아도르노에게 있어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이 야만적인 현상은 사실 자연의 지배를 원형으로 지닌다. 그렇다면 생명과 자유라는 두 가치는 억압에 대한 저항이라는 측면에서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다. 자연의 억압에 대한 저항과 인간의 억압에 대한 저항을 합쳐 넓은 의미의 자유라고도 말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 인간은 자연의 억압을 거부하는 그 선택의 순간부터 본질적으로 억압에 저항하는 안티테제 그 자체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은 과거 생존을 위한 것이었고 현재 자유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모습 그 자체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바로 억압에 대한 저항이다. 예술은 그렇기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이고 고귀한 것이라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은 어떤 방식으로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어떻게 인간이 추구하는 최상의 가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앞서 말했듯 지배와 억압이라는 테제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인간의 본성 그 자체로서 예술이 존재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도구적 이성의 인간에 대한 억압 이전, 이미 원시의 예술에서부터 안티테제로서 예술은 존재했다. 바로 자연의 폭정에 대한 저항이 그것이다. 동굴의 벽화는 대상을 잘 표현하는 것을 통해 사냥의 성공률을 높이고, 생존율을 끌어 올린다. 일정한 리듬의 북소리는 공동체적 통일과 화합을 통해 마찬가지로 생존율을 끌어올리는 역할이다. 자연의 폭정에 대한 저항, 그리고 자연의 억압을 이겨내고자 하는 인간의 선택은 세계를 변혁한다. 그러나 이곳, 원시에서의 억압에 대한 안티테제로서의 예술에도 이미 도구적 이성의 시스템, 타자에 대한 파괴를 통한 자기보전이 아직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서 존재했다. 그 요소는 이제 벽화에서부터 기호, 문자, 수 등의 추상화되는 개념들로 빠져나오고, 북소리에서는 법과 질서 등의 사회적 시스템으로서 빠져 나온다. 개념적 추상은 이제 특수성을 사상하고 획일화라는 시각에서 세계를 보게 하며 법과 질서는 인간을 지배와 억압의 주체인 인간의 입맛대로 재단하여 모든 인간의 시각을 고정시킨다. 초기 예술에서부터 이런 요소들이 도구적 이성이라는 측면으로 빠져나와 시스템화 되며 확고해지자, 이제 예술은 이 도구적 이성의 시스템에 대한 완전한 안티테제라는 측면으로 자리 잡는다. 그것이 시대의 변천에 따라 순수화된 예술의 모습이며, 또한 겉으로는 자연의 억압에 저항하는 생존의 수단에서 인간의 억압에 대항하는 자유의 수단으로 변천한 듯 하나 실은 인간의 본질 그 자체와 바로 맞닿아 있는, 억압에 대한 안티테제라는 측면에서는 그 본질이 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이 시대에서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