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행복 그리고 대인간커뮤니케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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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나 행복 그리고 대인간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나, 행복, 그리고 대인간커뮤니케이션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 사람들은 자신을 가리킬 때 ‘나’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하지만 ‘나’라는 단어를 쓰는 모든 사람들이 진정 ‘나’에 대해서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만남, 10차원의 행복’ 책과 교수님의 대인간커뮤니케이션 강의에 따르면 ‘나’는 내 안의 영적 존재이다.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은 ‘나’로서만 존재하며 모든 ‘나’는 구체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일인칭의 개별적 존재이다. 따라서 ‘나’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으며, ‘나’는 극히 작은 확률로 이 세상에 태어났으므로 기적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동안 수많은 철학자들이 밝히려 했던 나의 본모습은 자아, 무의식 등이 아닌 영적 존재로서의 ‘나’인 것이다. 우리는 이 ‘나’에 대해서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동안 나에 대해 자기소개서를 쓸 때의 나를 진정한 ‘나’로 잘못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일을 해봤고, 이런 것을 잘하며 이러한 진로를 생각하고 있는 나는 진정한 ‘나’가 아니다. 이렇게 여러 설명이 덧붙여진 나는 경험의 덩어리에 쌓인 나이기 때문이다. 나는 태어나고 자라면서 여러 다양한 활동을 통해 경험을 쌓고, 여러 경험이 쌓인 나는 사회적 존재로서 살아간다. 이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는 ‘일상적 자아’이며, 자아를 구성하는 모든 경험덩어리들을 하나씩 지워 나가면 마지막에 남는 것이 바로 ‘나’이다. 즉 ‘나’는 모든 경험을 하기 이전의 가장 본질적이고 순수한 그 자체로서의 ‘나’인 것이다.
나는 몸, 마음, 그리고 ‘나’라는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은 시각을 갖고 있는데, 몸의 시각은 보이는 것을 보는 시각이고 마음의 시각은 보고 싶은 대로 보는 시각이며, ‘나’의 시각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시각이다. 이 중 몸은 보이는 것만을 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행복과 관련이 있다. 몸은 오직 욕망에 따라 움직인다. 그리고 일반적인 사람들은 이 욕망이 충족되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렇게 욕망이 충족되어서 느끼는 것은 행복감이지 행복이 아니다. 행복과 행복감은 다른 것이다. 행복이 명품이라면 행복감은 그 짝퉁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에게 내재된 욕망은 세 가지가 있는데, 육체의 욕망, 자극의 욕망 그리고 비교의 욕망이 있으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에 대한 욕구가 추가된다. 사람들은 이러한 욕망 충족을 통해 발생하는 행복감과 행복을 동일시하고 있다. 행복감을 행복으로 착각하는 순간 행복감을 향한 욕망의 추구는 멈출 수 없게 되고 더 나아가 자신의 주체적 삶은 사라지며 종속적 삶만 남게 된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행복감이 항상 주체 중심적이 아니라 대상 의존적이기 때문이다. 행복감은 내가 얻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대상이 나에게 부어 넣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감은 주관적이며 순간적이다. 그리고 무언가에 대한 욕망은 끊임없이 생기므로 결국 행복감은 끝이 없다.
그런데 이 행복감을 느끼는 주체는 몸이다. 몸은 보이는 것만을 보기 때문에 보이는 것 그 이면의 보이지 않는 것을 보지 못한다. 몸의 시각이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몸은 욕망이 충족되면 행복감을 느끼는데, 몸은 이 행복감이 행복의 짝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지금 당장 기분이 좋고 행복하다고 느끼면 그것이 진정한 행복인 줄 안다. 행복감은 일시적인 것이므로 몸은 또 다시 행복감을 느끼기 위해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과정을 반복하다가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렇다면 진정한 행복은 무엇이며, 행복의 주체는 누구인가. 진정한 행복은 외부의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서 오는 것이다. 행복은 객관적이며 지속적이다. 행복은 ‘나’의 행복이므로 행복은 주체적이다. 몸이 행복감을 추구한다면 ‘나’는 행복을 추구한다. ‘나’라는 영적 자아는 측은지심, 긍휼, 자비, 사랑의 마음 등을 특징으로 삼으며 행복에 대한 바람을 갖고 있다. 따라서 진정한 ‘나’에 대해 알게 되면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행복이 너무 추상적이게 느껴진다.
인간의 삶에도 10차원이 존재하는데, 10차원의 패러다임은 영의 성숙 단계를 의미한다. 0차원은 뇌사, 식물인간 혹은 마약중독이나 게임중독 등으로 인해 영적으로 죽은 존재이다. 1차원은 생존만이 주된 삶의 목적인 경우이며 2차원은 대다수의 사람들이다. 3차원은 성공 지향적 인간이며, 2차의 쾌락 탐익적 인간에 비해 소수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0-3차원 안에 존재하며, 여기까지는 몸적 자아가 원하는 방향대로 움직인다. 4차원부터는 물질적이지 않고 영적이다. 4-9차원의 공간은 행복, 자유, 평화 등의 영적 가치들이 살아 움직이는 삶의 공간이다. 4차원의 인간은 의미를, 5차원의 인간은 자유를, 6차원의 인간은 자연과의 합일을, 7차원의 인간은 공존을, 8차원의 인간은 자비와 이타적 자기애를, 9차원의 인간은 사랑을 지향한다. 그리고 마지막 10차원의 인간은 만남을 지향한다. 진정한 행복은 이 만남으로부터 나온다.
10차원에서의 만남은 우리가 단순히 이야기하는 만남과는 다르다. 만남은 융합이다. 융합은 둘이면서 하나인 관계이다. 따라서 만남은 서로 다른 존재임을 인정하면서도 하나가 되는 것, 즉 타자성과 동일성의 공조이면서 동시에 서로 하나이면서도 둘로 남아있는 것, 즉 동일성과 타자성의 공존이다. 모든 행복의 차원들은 10차원의 만남, 즉 사랑의 원형과의 만남으로 연결된다. 대인간커뮤니케이션도 이러한 차원에서 말할 수 있다. 대인간커뮤니케이션은 내 몸에 있는 나, 네 몸에 있는 너가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서로의 안에 있는 진정한 ‘나’가 만날 때에야 비로소 서로의 소통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 앞서 말한 것처럼 ‘나’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며, 둘째 너와 내가 서로 다른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개개인의 인간은 서로 다른 환경 속에서 몇 십 년을 살았다. 따라서 성격이나 가치관 등이 모두 다르며 각각 타자성을 갖고 있다. 타자성이란 상대방이 이해하기 어렵고 또 받아드리기 힘든 개인만의 고유한 속성이다. 이 타자성을 우리는 모두 이해할 수는 없는데, 이 이해할 수 없음을 이해하는 것부터 만남은 시작된다. 상대방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진정한 ‘나’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상대방의 ‘나’를 이해하며 이 둘의 ‘나’를 융합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대인간커뮤니케이션이다. 그리고 우리는 진정한 대인간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질 때 진정한 행복을 느낀다. 이 행복은 진정한 ‘나’를 토대로 나오는 것이므로 지속적이고 주체적이며 절대적 선이다.
나를 포함하여 2차원적인 삶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 진정한 ‘나’가 누구인지 깨닫지 못했고 따라서 진정한 행복을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행복감과 행복이 무엇인지,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을 지금에서야 비로소 알게 된 나는 지금부터라도 진정한 나를 만나고 행복을 찾기 위해, 그리고 진정한 대인간커뮤니케이션을 위해 끊임없이 탐구하고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