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문 남녀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상호 공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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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남녀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상호 공존할 수 있다.
프랑스의 페미니스트 정신분석학자인 뤼스 이리가레(R. Irigaray)는 상식적인 성별 이분법을 뒤집어보는 또 하나의 출발점을 던져 준다. 오랜 세월 지속되어온 가부장제는 우리의 의식과 언어, 의미 체계 속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 안에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개의 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리가레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학, 더 확대하면 남근중심주의(phallocentrism)의 의미 세계 안에 유일한 성은 남성이며, 여성은 다만 남성에 대립되는 타자, 결점, 부재, ‘텅 빈 구멍’, 수수께끼 같은 심연으로 표상될 뿐이다.
여기에서 성별 이분법은 기실 여성과 남성을 각각 저울의 양쪽에 올려놓은 이원론이 아니라, 남성을 정상성의 기준으로 삼는 일원론적 가치의 파생물임이 드러난다. 모성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것도 남근숭배사상 내의 모성에 국한될 위험이 크다고 이리가레는 경고한다. “가치 있는 자기 생산물을 시기하는 소유욕에 갇혀 있는 모성, 능력을 겨루는 이러한 경주에서 여성은 자기 쾌락의 개별성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한국의 모성 이미지는 이중적이다. 가족과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금욕적 어머니의 이면에는 바로 자기 가족과 자식의 출세를 위해 맹목적 경쟁을 벌이고 끊임없는 욕망의 연쇄에 매몰되어가는 어머니, 곧 ‘포식자 아줌마’의 모습이 있다. 전자는 전통적인 형태로, 후자는 매우 현대적인 형태로 그 외양은 매우 다르다. 그러나 양자의 공통점은 가부장제로부터 벗어나고 독립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가부장제의 가치와 재생산에 공헌함으로써 일정한 위치를 인정받는 것에 있다.
그렇다면 모성이나 남성과 다른 어떤 차이를 내세워 성별 이분법 자체를 전복하려는 시도는 남성을 정상적 기준으로 하는 가부장적 상상력과 언어 안에서 맴도는 또 다른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문제는 하나의 성을, ‘하나가 아닌’ 복수의 성으로 해체하는 것이다. 남성의 대립물이나 그림자가 아닌, 그래서 가부장제의 파생물이 아닌 그 자체로 온전한 새로운 여성성을 승인받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리가레의 기획은 이론적 차원에서는 가부장제에 의해 추방된, 그리하여 제대로 언어화되지 못한 여성성의 파편들을 온전한 여성적 언어로 재구성하려는 ‘여성적 글쓰기’로 시도될 수 있다. 현실적 차원에서도 이리가레는 ‘성별화된 권리’를 주장하면서 평등 전략의 불충분성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여성과 남성은 똑같지 않으며, 현재의 사회질서는 결코 성차의 관점에서 볼 때 중립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시장의 현실을 보면 남성에게만 적합하도록 발달된 작업 조건과 환경 속에서 여성의 정체성을 소외당하지 않고 시민으로서 자기 생활비를 벌도록 여성에게 허용된 직업의 종류는 아직도 거의 찾기 어렵다. 가족의 지위에서 어머니 권리는 가부장제의 적자를 생산함으로써 누리는 모권에 국한되어선 안 된다. 더 나아가 어머니 자신의 권리를 민사적으로 인정받고 모계를 인정받을 권리 등을 요구해야 한다고 이리가레는 주장한다.
가부장제 하에서 허용되는 여성성이 아닌, 여성 자신이 표현하고 누리는 여성성에 대한 사회적 승인을 추구하는 것은 결국 여성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새로운 이분법으로 귀결되는 것일까. 필연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남성을 인간 보편의 기준으로 만드는 가부장적 이분법의 해체는 곧 기존의 권력과 지배질서 자체를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배의 구조를 바꾸지 않은 채, 단지 여성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이리가레는 덧붙이고 있다. 여성성을 승인하는 사회란 지배질서에 의해 주변화되었던 다른 소수자의 상상력과 언어를 인정하는 사회이기도 하다. 성이 더 이상 하나가 아니라면 그것이 반드시 둘일 필요는 없으며, 정형화되지 않은 새로운 개방성과 다원성도 함께 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