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독서보고서 - 팔꿈치 사회 -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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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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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한국기독교교회사 독서보고
“팔꿈치 사회: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 되는가”
들어가며
본 책을 읽으면서 문뜩 내 주변의 세상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과연 얼마나 경쟁에 무감각해져있을까? 그래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지성이 보고 대학교에서는 학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들어가기 위한 실용적인 스킬을 배우는 학원으로 전략하였다. 그래서 학생들은 학문을 하는 학생이 아니라 직장에 들어가기 위한 훈련소에 입소한 훈련병의 모습을 하고 있다. 매일 밤 늦게까지 도서관에서 전공과는 무관한 토익책을 끼고 공부하고 또한 온전한 본래의 의미의 봉사활동이 아니라 이력서에 들어갈 한 줄로서의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그래서 사회의 정신적인 보고라 할 수 있는 대학교와 대학생들은 이 시대의 빛과 소금의 역할은 고사하고 하루 하루 생존하는 것에 목말라 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얼마나 경쟁의 시대인지 지성의 보고인 대학을 평가하는 시대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대학을 평가하는 방법에 가장 큰 비중이 바로 취업률이라는 것이 개탄치 못할 뿐이다. 취업률이라는 것이 어떤 수치인가? 수많은 젊은이들을 밟고 자본에 선택된 소수의 사람들일 뿐이다. 그래서 취업률이 낮은 대학들은 대학 사이에서 또한 사회에서 부실 대학이란 이름으로 낙인을 찍어 도퇴시켜버린다. 이런 취업률을 가지고 대학을 평가하기 때문에 대학들은 어쩔수 없이 학생들을 경제적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학문적인 가치를 포기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학교마다 토익서클이 넘쳐나고 고시스터디와 취업박람회가 넘쳐나가는 실정이다.
이렇게 대학교 뿐만 아니라 초중고 학생들을 바라보면 경쟁의 논리가 더 심하다. 초중고 의 청소년 아이들은 최소 6년에서 최대12년까지 과정에서 배우는 것은 하나이다. 옆의 친구를 밟고 1등이 되는 것을 가르친다. 그래서 학력평가와 성취도 시험과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본다. 이렇게 해서 전국의 각 학년별 학생들을 1등부터 꼴등까지 일렬로 평가한다. 선두그룹에 가까운 학생들은 칭찬을 받고 하위권 학생들은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다. 그리고 또한 사회적 시선 또한 선두권학생들은 모범생이라는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하위권학생들은 공부도 안하는 소위 노는 아이들 날라리로 평가하는 시대이다. 초중고등학교는 아이들이 사회의 가치를 배우고, 꿈을 선택하는 곳이다. 그러나 이미 경쟁의 논리에 침식당해 아이들은 꿈을 정하고 사회의 가치를 배우기 이전에 경쟁이라는 것을 배우고 있다. 그래서 아이들의 꿈없이 경쟁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매일 밤 늦도록 학원을 전전하며 불안함을 해소하고 있다. 이것이 온전한 교육인가? 경쟁의 노동자들을 양성하는 기초양성소로 밖에 볼 수 없다. 그래서 이러한 경쟁의 논리에 지쳐 떨어져 자살이라는 극단뿐적인 선택을 하는 아이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온전한 학교의 모습이며 경쟁이라는 개념이 학교에 맞는 개념인지 그리고 학교가 지향해야할 이념인지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학교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경쟁의 논리는 가정을 지배하고 있는 시대에 지금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요구하는 기대는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을 요구하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한 자녀들을 양육하는 방법도 경쟁 논리에 입각한 방법들이다. 자녀들의 성적 향상으로 인한 자녀들의 신분 상승이 그 목적이다. 자녀들을 사람답게 양육한다는 미명하게 부모들은 자녀들의 성적만을 신경쓴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들은 책을 읽으며 온전한 내면의 자아를 키우는 활동보다 학원에 가서 시험 성적을 올릴 스킬을 배우는 것을 더 선호한다. 그리고 자녀들은 어떠한가? 부모의 이런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 성정을 올리기만을 위해 노력한다. 부모의 사랑을 받기 위해 자녀들은 성적을 올리기에 열중이다. 결국 자녀들은 성과주의로 치우치게 된다. 과연 부모의 사랑은 성과에 따라 지급받는 월급과 같은가? 이러한 사랑과 관심에 대한 가치조차 상실하게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세상의 보루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할 교회는 어떠한가? 교회도 1970년대를 지나오면서 소위 말하는 부흥을 이루어냈다. 교회 안에 부흥의 시기에 경쟁의 논리가 침입하였다. 1970년대 교회가 부흥하면서 교회에 새로운 신학이 등장하였다. 바로 교회 성장주의였다. 교회의 근본 되는 예수의 삶과 예수의 복음과 성경이 증언하는 야훼의 신앙보다 교회의 성장과 성도의 증가 교회의 외형적인 성장과 헌금액의 증가를 우선시 하였다. 그리하여 교회는 새생명 축제, 총동원주일, 셀목회 하며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심지어 새생명 축제의 캐치프레이스로 1+5라는 구호가 나돌 지경이다. 또한 큰교회가 기업이 되었다. 그래서 다른 회사의 mna와 같이 작은 교회를 거의 인수하다시피한다. 또한 경쟁교회의 교인을 뺏어오기 위해서 서로를 비난하며 신천지다 규정하기 까지 한다. 이런 경쟁논리의 틈에서 신천지와 같은 이단이 더 자생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될 정도이다. 이렇게 교회가 경쟁논리에 침식당한 결과가 어떠한가? 그 어떤 사회보다 더 극명하게 그 결과가 지금 우리 앞에 들어나고 있다. 목회자들은 경쟁의 주도자들이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요즘 시쳇말로 슈퍼 갑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기에 갖는 기본적인 윤리의식조차 망각하였다. 하나님께 드린 헌금에 대한 횡령은 기본이다. 여성 신자들에 대한 성추행 및 성폭행은 옵션이 되었다. 과연 교회의 이런 모습에 누가 좋다고 교회를 지지할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이미 세상에 대한 교회의 지지는 철회되었다. 이제 교회는 비난의 대상을 지나 힐난의 대상이 되었다.
경쟁은 우리 주변에 이렇게 광범위하게 펼쳐져있다. 경쟁의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경쟁에 대해 올바로 알고 있는가? 이런 경쟁에 올바르게 대처하고 반응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팔꿈치 사회라는 책의 저자 강수돌 교수는 자신의 저서 팔꿈치 사회를 통해서 경쟁의 사회속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시민, 대중, 민중, 피경쟁자들에게 이 시대에서 만연한 경쟁논리에 대해서 규명하고 이 경쟁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모습과 경쟁을 극복하며 뛰어넘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경쟁이란 무엇인가? 경쟁이란 말의 어원을 보면 라틴어로 함께 추구하는 것이란 뜻이 있다. 이것은 뭔가 바람직하거나 공통적인 것을 위해 더불어 가는 것이다. 과연 지금 이 시대는 이런 의미에서의 경쟁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이런 의미에서의 경쟁이라면 적극 찬성해야하지 않을까?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경쟁은 이런 긍정의 경쟁이 아니다.
그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독일에서 1982년 올해에 단어로 선정된 팔꿈치 사회(Ellenbongengesellcshaft)라는 단어로 규정하였다. 그 뜻은 지금 우리 사회는 100m 달리기와 같다고 본다. 그런데 팔꿈치로 옆의 사람을 쳐서 낙오 시키고 자신이 1등이 되어야만 하는 무자비한 무한 경쟁사회라는 뜻이다. 이는 1등 즉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뜻도 된다. 오히려 경쟁 사회 속에서 이런 반칙은 배척당하지 않는다. 되려 지혜롭다, 똑똑하다라고 칭찬을 받게 된다. 과연 이러한 사회가 정당한 사회인가?
이런 경쟁을 일으키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누가 과연 이런 경쟁을 유발하는가? 우리는 생각해보아야한다. 우리는 보통 경쟁을 인류 생존의 기본 법칙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또한 경쟁은 인류가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된 자연 법칙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저자가 편협한 다윈주의 즉 사회적 다윈주의 때문이다. 다윈주의의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법칙을 기계적으로 사회에 적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사회를 약육강식의 세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경쟁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또한 인류는 산업화를 겪어오면서 경쟁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이때 경제가 성장이 되고 먹고 사는 것이 편안하게 된 것이 경쟁 때문이라는 생각에 경쟁은 필수 불가결하고 긍정적인 것이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경쟁을 일으킨 주체는 자연의 법칙이 아닌 자본이라고 규정하였다. 또한 자본을 이용한 정치권력이라고 규정한다. 경쟁은 필연적으로 생겨난 규칙과 법칙이 아니다. 경쟁은 저자가 말했듯 자본과 정치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과 사회 프로세스일 뿐이다. 나는 이것을 자본과 정치권력의 통치술의 일종으로 경쟁이 사용되었다고 생각한다. 자본과 정치 권력은 자신들 외의 대다수의 사람들의 경쟁으로 인해 파생되는 산물을 가지고 이윤을 창출한다. 그리고 또한 자본과 정치권력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경쟁이 필요하다. 이러한 자본의 이윤 창출의 목적을 가지고 자본은 경쟁이란 개념을 창출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자본은 자신들의 이윤을 더욱 창출하기 위해서는 경쟁을 심화시킨다.
시장에는 독과점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런 독과점한 자본이 유지되지 위해서는 경쟁이 더욱 심화되어야 한다. 이렇게 자본은 경쟁을 심화시켜야만 유지 할 수 있다. 자본이 경쟁을 유지시키는 방법은 간단하다. 바로 인간의 내면의 가장 약한 부분인 두려움을 자극하는 것이다. 일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지 않으면 사회에서 도태된다는 것을 계속해서 심어주는 것이다. 즉 일하지 않으면, 경쟁하지 않으면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심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경쟁에서 승리한 케이스를 만들어서 열심히 일하고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은 이렇게 기득권들처럼 윤택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음을 심어주는 것이다. 자본은 이렇게 사람들을 경쟁에 이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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