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원 문학관 답사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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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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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황순원 문학관 답사 보고서

1. 황순원 생애와 배경
2. 문단 활동
3. 그의 작품세계
4. 다녀 온 소감
1. 황순원 생애와 배경
1915.평안남도 대동 출생
1931.『동광』 나의 꿈, 아들아 무서워말라 등단
1934.『삼사문학』 동인 참가
1936 ~ 1939.와세다대학교 영문 학사
1940.단편집 『늪』 간행
1945 ~ .조선청년 문학가협회 회원, 한국문학가협회 소설분과 위원장
1946 ~ 1955.서울중고등학교 교사 재직
1955.아시아자유문학상 수상
1957 ~ 1982.경희대학교 문리대학 교수 재직
1961.예술원상 수상
1966.3.1문화상 수상
1970.국민훈장 동백장 수상
1983.대한민국문학상 수상
1987.제1회 인촌상 수상
1982 ~ 1992.경희대학교 명예교수 재직
2000.타계(2000년 9월 14일).
출생: 황순원은 1915년 3월 26일, 평양에서 가까운 평안남도 대동군 재경면 빙장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제안(齊安). 조선시대 영조 때 일명 황고집으로 알려진 효자가 있었으니, 집암(執庵)이라는 호를 쓰는 황순승(黃順承)이라는 사람이 그 사람으로 바로 황순원의 8대 방조가 된다. 가문을 따지는 일이 가부장제 전통을 반성 없이 답습하는 일이긴 하나 어쨌든, 그 황고집 집안의 기질은 그의 조부 황연기(黃練基), 부친 황찬영(黃贊永)으로 이어지는 동안에도 끊이질 않고 있었던바, 특히 부친은 3.1운동 때 평양 숭덕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평양 시내에 배포한 일로 옥살이를 하기도 한다. 그때 황순원의 나이 만 4세. 아버지가 1년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는 동안 어머니 장찬붕(張贊朋)과 단둘이 시골집에서 고독하게 지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황순원이 맏이이고, 밑으로 아우가 둘이다.
소학교 소주: 1921년 만 6세 때 가족 전체가 평양으로 이사하고, 만 8세 때 숭덕소학교에 입학한다. 유복한 환경에서 예체능 교육까지 따로 받으며 자라났다. 소학교 시절 이미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는데, 이는 체증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었다. 술 얘기라면 여기서 미리 더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열두어 살 때부터 마신 소주를, 그는 일흔이 넘도록 마셨고, 그 뒤로 몸이 쇠하여서도 타계할 때까지 매일 마주앙을 마셨다.
학창시절 첫 시집:
1929년에는 정주에 있는 오산중학교에 입학한다. 그곳 교장 출신인 남강 이승훈을 먼 발치에서 보면서 "남자란 저렇게 늙을수록 아름다워질 수 있는 것이로구나"(단편 「아버지」) 하고 느꼈다는 황순원의 고백을 뒷날의 제자들은 기억해 냈고, 황순원이 늙어가는 모습에서 그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오산중학교에서는 한 학기를 마치고, 다시 평양으로 와서 숭실중학교로 전입학한다.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그 이듬해 무렵부터. 첫 발표는 1931년 7월 『東光』 을 통해서인데, [나의 꿈]이라는 시가 그 등단작이다. 이후 중학교 시절 거듭 시를 발표하다가 1934년 졸업과 함께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와세다 제2고등원에 입학한다. 이해랑, 김동원 등과 함께 극예술 연구단체 를 창립. 이 단체 명의로 27편의 시가 실린 첫 시집 『放歌』 간행. 이듬해 여름 방학 때 귀향했다는 조선총독부의 검열을 피하려고 동경에서 시집을 발간한 것이 사유가 되어 평양경찰서에서 29일간 구류를 산다.
결혼 내조:
1935년 1월, 평양 숭의여고 문예반장 출신으로 일본 나고야 금성여자전문 재학중인 동갑의 처녀 양정길과 결혼. 이들 부부 사이에는 이후, 나중에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성장하는 맏아들 동규(東奎)를 비롯, 차남 남규, 딸 선혜, 3남 진규 등이 태어나 자라게 된다. 황순원은 이북에서 살다가 월남한 다른 사람들에 비해 직계 가족간의 이산의 아픔이나 비극을 겪지 않은 다행스런 가족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데, 그런 중에도 피할 수 없는 6.25 전쟁기 피난 시절의 가난과 그 이후의 생활고를 몸소 부딪쳐 해결해낸 부인의 내조가 오늘날 황순원의 이름을 그토록 뚜렷하게 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