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감상문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1  독서감상문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1
 2  독서감상문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2
 3  독서감상문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3
 4  독서감상문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4
 5  독서감상문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5
 6  독서감상문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6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 레포트 > 독후감
  • 2015.03.29
  • 6페이지 / hwp
  • 1,000원
  • 30원 (구매자료 3% 적립)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독서감상문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사랑으로써 생명에 취하는 삶을 가르쳐준

○ 본문 요약
‘죽음에 취해있음’은 어떠한 상태를 의미하는가? 이는 곧 살아있더라도 죽어있는 상태에 놓여있음을 의미한다. 즉, 살아있다고 해서 살아있는 것이 아닌, 죽어있는 삶을 산다는 뜻이다. 이는 정체성의 관점에서 볼 때 실제 ‘나’, 즉 ‘영’에 의한 삶이 아닌, ‘만들어지는 자아(Ego)’에 의한 삶을 사는 것이다. 또한, 행복의 관점에서 보면 ‘영’이 주는 구체적이고 객관적이며 지속적인 ‘행복’이 아닌, ‘몸’이 주는 추상적이고 주관적이며 일시적인 ‘행복감’에 중독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몸의 관점에서 보면 나를 나의 몸으로 여기고 살아감으로써 몸도 죽게 됨을 의미한다. 즉, 주체가 몸에 종속되어 몸에만 집착하면 집착과 증오라는 양극단의 현상이 발생하는데, 집착은 생존과 장수에 매달리고, 증오는 파괴적인 쾌락에 종속된다. 향유의 관점에서 보면 향유의 진정한 죽음은 내가 그 향유에 빠져 극단적인 행복감을 느낄 때 발생하게 된다. 즉, 가장 죽어 있을 때 가장 살아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관계의 관점에서 보면 상대방의 타자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상대방의 부분만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상대방의 현재의 타자성과 미래의 변화가능성을 온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한 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만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처럼 죽음에 취해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기적인 몸의 욕망에 따라, 몸에 종속된 채, 주관적인 행복감을 얻기 위해 평생을 뛰어다니며, 쾌락에 종속되어 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여러 가지 관점에서의 ‘죽음에 취하는 삶’을 정확하게 분석한 뒤, ‘죽음을 취하는 삶’은 어떤 삶인가를 알고, 마지막으로 ‘생명에 취하는 삶’은 어떤 삶인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먼저 ‘나의 죽음’에 대해서 살펴보자. 우리는 얼마든지 누군가의 삶을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그가 세상에서 경험한 것일 뿐 경험을 한 그 사람 자체는 아니다. 경험이란 양파 껍질과 같은데, 경험은 하면 할수록 양파 껍질처럼 싸인다. 그러므로 일상적인 정체성은 사실 경험의 집합에 불과하다. 경험이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욕망이 증가한다. 따라서 경험이 늘어날수록 정작 나 자신으로부터는 멀어지는 결과가 발생하게 된다. 이처럼 경험이 둘러싸는 ‘나’는 우리의 몸 안 어딘가에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데, 이를 표현할 단어는 ‘영’밖에 없다. 사람들은 몸이 자신이라고 느끼는 것을 훨씬 자연스러워한다. 그렇지만 몸은 영의 ‘짝퉁’에 불과하다. 몸은 가시적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가시적인 것들을 욕망함으로써 몸적 자아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영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의미나 사랑과 같은 비가시적 가치를 원하고 결과적으로 영적 자아를 만든다. ‘마음’이란 일종의 그릇으로, 가치중립적인 속성을 띄는데, 죽음에 취한 사람들은 몸적 자아로 보이는 대상의 욕망을 따라 마음의 모든 사유와 행위를 조율한다. 그러나 우리는 몸이 아닌 영을 보며 살아야 한다. 즉, 몸이 나를 지배하는 죽음의 질서가 죽고 내가 몸을 지배하는 생명의 질서로 재탄생해야 한다.
‘행복의 죽음’은 몸이 주는 행복감에 중독되어 영이 주는 행복을 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몸적 자아는 순수하게 이기심에 의해 움직이는데, 몸적 자아는 생존과 안전이라는 육체의 욕망, 뭐든지 즐기고 원 없이 소유하고자 하는 자극의 욕망,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그들보다 더 보기 좋은 삶을 살고자 하는 비교의 욕망을 추구한다. 욕망 충족을 향한 이 모든 몸부림은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나를 위한 도구로만 여기는 몸적 자아의 이기심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러한 몸이 주는 ‘행복감’은 절대 행복이 될 수 없다. 일단 행복감은 내가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행복감은 대상이 나에게 행복감을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고, 따라서 행복감은 대상 의존적이다. 이때 자율은 상실한 채 마치 노예처럼 행복감의 새로운 유혹을 따라 끌려 다니게 된다. 즉, 좀 더 강한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것이다. 행복감을 행복으로 아는 사람들은 그 행복감이 계속 유지되기를 바라고, 그 유일한 방법은 매일 새로운 행복감에 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올라갔던 것은 무엇이든 반드시 내려온다. 행복감의 실체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계단식 행복’이 아닌 것이다. 내려가기 싫어 행복감의 킥을 빠르게 반복한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 그 반복 과정 전체가 통째로 지루하고 싫증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불행을 정상으로 여기게 된다. 외로움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공허를 극복하기보다는 그것을 미화하고 낭만적인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행복을 찾기보다 저항과 버팀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저항의 끝에서는 정신적 혹은 육체적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몸이 아니라 영이라면, ‘몸의 죽음’이란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몸의 죽음은 ‘자연과의 합일’을 주장한 인물인 스피노자와 장자의 사상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스피노자는 자연도 신이고 우주도 신이며 인간도 자연 안에 있으므로 신이라는 범신론을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신과 분리된 다른 존재는 있을 수 없으며, 신은 개념상 무한하다. 따라서 그는 죽음은 소멸될 수 없고, 단지 변화할 뿐이라는 결과를 도출해낸다. 장자도 이와 비슷한 입장을 견지한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므로 죽음은 형태만 바뀌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의 주장과 같이 인간은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은 옳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인간이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몸이 돌아가는 것이다. 진짜 나인 ‘영’은 몸이 아니고 물질이 아니므로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다. 즉, 이 두 사람은 인간을 정신과 육체, 마음과 몸으로만 보았기 때문에 ‘나’를 말하면서 정작 ‘나’를 잃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의 죽음에 대한 개념을 넘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정확히 이해해야 할 현실로 보아야 한다. 인간은 몸과 마음만의 존재가 아니라 마음먹고 몸을 행동으로 완성하는 ‘나’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때 마음먹는 주체인 ‘나’는 영적 존재로 보아야 한다.
우리는 ‘향유의 죽음’을 통해 사랑과 구분되는 욕망과 쾌락에 대해 알 수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죽는 것이다. 기존의 나의 모든 욕망, 비전, 습관, 취미 등 모든 것이 상대방 중심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한다는 것은 죽는 것, 그리고 새로운 존재로 부활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은 그 존재 안으로 내가 용해되어 들어가지만, 욕망은 그 존재가 내 안으로 용해되어 들어오기를 원한다. 이는 소유하고 싶은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그 소유욕이 충족된다고 하더라도 욕망의 주체는 대상을 진정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유되어진다. 대상의 아름다움이 나의 욕망을 발생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욕망은 그 욕망이 원하는 것만을 향한다. 이처럼 사랑은 희생을 낳지만 욕망은 극단적 소유욕과 집착을 낳는데, 두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동시에 소유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향한 사랑은 유혹에 의한 죽음으로서의 이끌림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를 향한 스스로의 내어줌이 되어야 한다. 사드의 은 쾌락에 대한 진실을 잘 보여준다. 이 책에서 블랑지스 공작과 다른 사람들은 미소녀와 미소년을 납치하고 이야기꾼들과 요리사를 대동하여, 스위스의 뒤세르에 있는 별장으로 가서 120일 동안 모든 상상을 현실화하여 성적 쾌락을 즐긴다. 마지막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죽인 후 인육을 즐기고 성을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 책에서 알 수 있는 점은 욕망이 ‘끝까지 가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즉, 하나의 욕망이 만족되면 다른 욕망이 나타나고, 그렇게 욕망의 추구는 지속된다. 그런데 욕망은 처음에는 달콤한 것에서 시작했다가 덜 달콤한 것, 약간 고통스러운 것으로 넘어가고, 고통스러운 것에서 결국 극단적 고통으로 넘어감으로써 종국에는 죽음으로 나아간다. 즉, ‘고통’과 ‘쾌락’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이다. 쾌락에 깊이 탐닉하게 되면 어느 순간 그것이 고통으로 바뀌어도 고통인 줄 모르고 좋아하며 따라 하게 된다. 즉, 쾌락이 고통으로, 고통이 중독으로, 그리고 중독이 삶의 파괴로, 결국 극단적인 경우 허무로 인한 자살이나 살인에 이르기까지 고통을 고통인 줄 모르고 쾌락으로 착각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관계의 죽음’은 타자성의 개념을 통해 알 수 있다. 시간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첫 번째는 일반적인 시간인 크로노스로, 수평적이고 양적인 시간이다. 그러나 실제로 크로노스는 없는데, 우리가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경험하고 사는 것은 변화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진짜 시간은 카이로스로 보아야 하는데, 이는 질적 구분이 있는 시간을 의미한다. 즉, 카이로스는 수직적이며 질적인 의미의 시간이다. 철학자 E.레비나스는 이 같은 의미를 만드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타자와의 관계에서 찾았다. 그는 “시간은 주체가 홀로 외롭게 경험하는 사실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자체”라고 규정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것을 현재로 경험하는 주체는 바로 나, 즉 현재는 ‘나 중심적’이다. 과거는 자아가 아직 발생하기 전 단순한 의식의 단계이다. 그렇다면 미래를 선물해줄 타자는 나의 현재에서 이해될 수 없는 존재를 의미한다. 즉 나 중심적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인데, 미래가 되기 위해서는 현재와 미래가 연결되어야 하므로 결국 내가 경험하되 나 중심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존재를 만나야 한다. 또한, 그는 대부분의 사람은 이기적이므로 ‘이해한다(understand)’는 단어의 어원과 같이 ‘내가 너의 밑에 서서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는 것’이 아니라 ‘네가 나의 밑에 서도록’ 만든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그는 상대방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해’를 포기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는데, 즉 이 자기중심적이고 독단적인 관점을 내려놓아야만 내가 관계하는 그 사람이 진정한 타자가 되고, 그때 비로소 미래를 만날 수 있다고 말한다. 타자성은 모든 주관적 이해를 거부한다. 타자성은 내 앞에 있는 저 존재가 단순히 나와 다른, 차이만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더 나아가 내가 함부로 판단하거나 규정할 수 없는 그만의 존재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