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리처의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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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리처의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를 읽고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를 읽으면서 처음 ATM기에서 친구와 함께 계좌이체를 하던 순간이 생각났다. 체크카드를 넣고, 타은행의 계좌로 돈을 송금하고 무인기에 카드를 꺼내는 순간, 친구와 나는 ‘세상 참 좋아졌다’고 대화를 나눴다. 돈을 송금하려면 종이에 금액과 계좌를 적어 타행이체서약서(?)를 쓸 필요도 없이, ATM기에 카드만 넣고 송금할 수신계좌를 누르고 확인만 하면, 간단하게 계좌이체가 이루어진다. 은행원을 볼 필요도 없고, 정해진 업무(타행이체, 입금조회, 계좌이체, 통장확인)에 대해 처리 가능하다. 또한 ATM기에서는 언제나 동일한 절차가 (카드 넣기→ 하려는 업무 선택→ 확인) 예측가능하며 주말에도 심지어 쉬지 않고 돌아간다. 효율성은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최적의 수단의 추구를 포함한다. 복잡한 절차의 간소화, 제품과 서비스의 단순화, 그리고 종업원이 하던 일을 고객에게 하게 하는 것(p. 118), 계산가능성은 수량화에 대한 강조(질보다는 양을 강조하는) 양에 대한 착각(p. 150), 예측가능성은 시간과 공간에 상관없이 모든 것을 동일하게 하기 위한 훈련, 체계화, 관례 같은 것에 대한 강조, 종업원의 언행, 종업원 행동에 대한 관례화(p.184)
그러한 과정은 굉장히 효율적이면서 합리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참 세상이 좋아졌다라고 느끼게 말이다. 조리 리처가 말하듯, 현재의 맥도날드화된 세상의 잘못된 점을 꼬집고자 과거로 회귀하자거나, 예전이 좋았다는 말은 큰 설득력이 부족할 법하다. 여러 가지 절차가 줄어든다는 것은 그만큼 적은 시간, 적은 업무 처리가 필요한 것이며, 이는 나의 시간이, 나의 업무가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간혹은 은행처리를 하는데, 은행원을 봐야 하는 번거로움보다는 차라리 무인ATM기가 더 편하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ATM기와 똑같은 업무처리를 하는데, 굳이 은행원을 대면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한적한 시간에 은행원은 자기 업무를 처리하는 데 반해, 외부에 있는 ATM기에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왕래한다.
인간의 상호관계가 없어지는 것이 더 편한 사회, 조지 리처는 다양한 합리성이 가득한 사회에 만연한 비합리성을 논한다. 사람들은 여가, 식사 등 온갖 모든 행위를 맥도날드화된 과정에서 대체된 행위를 할 수 있다. 전자렌지 하나면 ok! 편의점 퓨전 레시피 6종이 인터넷을 떠돌기도 하고, 휴대폰을 통해 온갖 가벼운 정보를 굳이 찾지 않아도 페이지를 넘기기만 해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온갖 정보 속에서 맥도날드화된 곳에서 먹는 음식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어떠한 성분인지는 잘 알 수가 없다. 컵에 유자를 부어서 먹을 수 있는 유자음료를 하나 살 때도 말이다. 두 종류의 유자차가 있을 때, 유자성분이 20%인지 25%인지를 비교할 수는 있지만, 나머지 성분들이 무엇 인지 알 수가 없으며 비교하기도 힘들다. 정제당과 갖은 온갖 가공성의 음식을 만들어내는 성분들은 음식이 아니지만, 유자차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대체되어서 지나친다. 정체를 안다면 그다지 먹고 싶지 않지만, 편리하고 빠르고 싸다는 이미지가 그 의미와 정체를 덮어버린다. 유자 100%로 음식을 만들기에는 많은 수고스러움과 불편함이 대조된다. 개인의 노력만이 아닌, 사회구조적 차원의 문제도 당연히 엮어있는 것이다.
유토피아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 조지 리처는 끊임없이 가두어놓지만 편안함을 느끼는 벨벳감옥, 부정적인 요소를 갖고 있는 것을 알지만 맥도날드의 다른 측면은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고무감옥, 맥도날드화 과정에 큰 불쾌감을 느끼고 탈출구가 없다고 느끼는 쇠감옥으로 개인과 그들이 사는 곳을 표현한다. 결국은 감옥이지만, 개인이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다른 성격의 감옥일 수 있겠다. 바우만은 이러한 상황에서의 주체의 모습을 두 가지로 나누어서 본다. 하나는 이미 체제에 포섭되어 저항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인 경우이다. 이러한 유형은 지옥 안에 있음에도 지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체제에 내면까지 포섭되거나 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된 것이다. 반면 다른 하나는 ‘지옥’이라 부르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온갖 종류의 압력에 맞서 용감하게 싸워야만 하는 주체의 모습이다(Bauman, 2010: 172-175) 바우만은 더 이상 나은 세상이 없을 것이라는 비관 때문에 저항이 좌절된다고 본다. 본래 유토피아는 고생이 끝날 것이라는 약속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겼으나 사냥꾼의 유토피아는 고생이 결코 끝나지 않는 꿈이다. 삶의 목표가 아니라 이미 삶의 현실이 된 유토피아는 검증이 필요 없는 것이다 (Bauman, 2010: 172-175).
조지 리처의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요람에서 무덤까지 우리의 삶이 쇠감옥 안에 있으며 자신을 옥죄고 있다고 느끼지 않다고 하더라도 사실상 우리를 통제하고 있으며 이전에 노동에서 느끼던 소외를 현재는 스스로를 개인화하고 파편화함으로서 다시금 대체되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 대해 강하게 염려하고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Bauman, Zygmunt. 2007. Liquid Times: Living in an Age of Uncertainty. 한상석 역. 2010.『모두스비벤디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 후마니타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