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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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미학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목차※
1. 세상에 태어난 자의 숙명으로서의 자연.
2. 자연에 대한 도발.
3. 자연이 아닌 인간.
4. 고통 없는 삶의 모순.
5. 욕구를 넘어 욕망으로, 영원한 권태의 굴래.
6. 욕망, 죄의 선고를 받아야만 하는 것일까.
7. 신과 욕망.
8.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 신.
9. 플롯의 바깥,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
10. ‘나’의 플롯을 짜기 위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 = 예술.
11. 꿈틀거리는 것이 아름답다.
1. 세상에 태어난 자의 숙명으로서의 자연.
태어나기를 선택하여 태어난 사람이 있을까요? 분명한 것은 태어난 이상, 죽음을 피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태어남과 동시에 생존에 대한 강한 욕구를 가지는 것이지요. 즉 육체로서의 인간은 전적으로 이 욕구의 지배 아래에 있게 되며, 이 욕구를 거스르면 고통을 얻고, 욕구를 따르면 쾌락을 얻는 동물입니다. 감각기관을 거쳐 전해지는 수많은 세상에 대한 정보들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들어오는 것들입니다. 나는 보기 싫은 것들도 보게 되고, 듣기 싫은 것들도 듣게 됩니다. 이렇듯 사람은 기본적으로 수동적인 상태에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수동성이 인간의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영역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게 주어진 세상을 또한 나는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가령,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다거나, 부잣집 자녀로 태어난다거나, 한 부모 가정에서 태어난다거나, 고아원에서 태어난다거나 하는 모든 상황들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수동성은 나의 선택과 나의 의지의 결과물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분 나의 인생을 결정짓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전적으로 우연적 산물인 나를 책임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자연의 섭리로, 약육강식이라 불리는 동물의 세계에도 적용되는 냉혹한 법칙이자 숙명입니다.
2. 자연에 대한 도발.
인간이 주어진 대로 살아가기를 원했다면, 굳이 자연과 분리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은 욕구가 아닌, 욕망의 동물로, 스스로 자연에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어쩌면 약한 몸뚱아리를 가지고 태어나게 한 자연에게 원망의 감정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약함을 무기로 무장하여 덮었고, 동물의 왕으로 군림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이 동물로 불리는 것조차 불쾌하게 여기기 시작합니다.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었고, 이를 문명의 발전이라 부릅니다. 여기에서 자연은 인간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게 됩니다.
인간이 자연에 있어서 거스르고자 한 부분은 단 하나입니다. 바로 ‘약육강식’의 법칙입니다. 약한 자들이 자연의 섭리에 따라 처참히 죽어가는 것을 견디기에 인간의 감수성은 너무나 발달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관점에서 자연의 냉혹함이란 거의 ‘괴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아무도 없는 숲 속에 거대한 불곰 한 마리와 마주한 상황에 처해있는 것을 상상해 본다면, 자연의 무서움을 금방 인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몇 일을 굶은 상태인데 눈 앞에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내 신체의 자연적 속성이 갖는 무시무시함 또한 금방 깨닫게 됩니다. 이렇듯, 사실 자연 자체는 하나의 두려움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예로부터 인간은 생로병사라는 생존으로부터 오는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꿈꿔왔습니다. 어떤 이는 그 문제의 원인을 내면의 집착에서 찾아내어 해탈할 것을 주장했고, 또 어떤이는 외부로 나아가 자연을 자기 멋대로 자르고 옮기며 지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인간의 승리였고, 이제는 어느 정도 생존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난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자연에서 비롯하였던 생존의 공포가 사라지자, 이제는 인간이 만든 다른 공포가 등장했습니다. ’자연의 ‘약육강식’의 잔인한 법칙을 인간의 ‘약육강식’의 법칙으로 대체했던 것이지요. 그 끝은 ‘전쟁’이라는 참혹한 결과였습니다. 이 참혹함 앞에 욥기에서 빌닷의 ‘시작은 미미하였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라는 말까지 떠오릅니다. 마치 전쟁등의 인간사의 갈등이 자연의 섭리에 반하는 대가로 얻은 벌처럼 느껴져 지금이라도 어서 자연을 숭배했던 예전으로 돌아가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인간은 자연을 지배했을지언정 정작 자기 자신은 지배하지는 못했었습니다. 즉, 자기 자신 또한 자연의 일부로서 잔인한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간과했던 것입니다.
3. 자연이 아닌 인간.
자연을 단순히 ‘약육강식’의 법칙으로만 상정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자연을 보는 것이 사실은 자연을 통해 비치는 인간 자신을 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연에 아름다운 속성과 잔인한 속성이 있는 것은 사실 인간 자신의 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과 인간을 따로 분리된 개념으로 말한다면 자연의 약육강식이라는 법칙과 인간의 약육강식의 법칙을 거스르고자 하는 의지로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인간이란 오직 자연 잔혹한 속성의 반대항으로 있을 때에만 비로소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사실상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굳이 둘의 개념을 나누어 살펴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으로 불리기 위해서는 잔인한 속성을 제거해야만 합니다.
‘소유냐 존재냐’에서 에리히 프롬은 인간이 왜 파국을 묵인하는지에 대해 강력한 일침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는 먼저 새로운 사회에는 반드시 인간의 지배적 성격구조의 근본적 변화가 병행되어야 함을 소리칩니다. 즉, 자연의 잔인적 속성을 없애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그런 힘을 가질 수 있는 존재로서 비로소 ‘인간’이라 불러지는 존재이기 때문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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