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 옐친의 승계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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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옐친의 승계정책
소련이 붕괴된 후 이제 국제적 관심과 힘은 보리스 옐친이 영도하던 러시아 공화국으로 쏠리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때에 옐친은 공산당 강령이 아닌 법과 제도가 지배하는 민주국가를 건설하고, 경제난을 해결하며, 국제사회의 완전한 일원으로서 서방의 배척을 받지 않는 새로운 민주 러시아를 건설할 책임을 부여 받았다.
○ 옐친정권, 정치의 흐름
제일 먼저 옐친이 착수한 것은 소연방 소멸 후 국제사회의 공포심의 대상이 된 핵무기 및 대량살상무기의 완전하고도 안전한 통제였다. 이를 위해 그는 친미(親美)파인 안드레이 코지레프 외무장관을 통해 미국의 베이커 국무장관과 긴밀한 협의를 진행했다. 수차례의 협의 끝에 이들은 카자흐스탄과 우크라이나에 배치된 핵무기를 러시아로 이관하는 원칙에 합의했고, 이를 대가로 막대한 경제 원조를 진행하였다.
핵무기 및 대량살상무기 문제와 함께 옐친이 신경을 써야 했던 문제는 러시아 경제개혁이었다. 그는 민주화된 러시아의 부활이 서방에도 이익이 된다는 논리로 서방의 지원을 요청하였고, 예고르 가이다르를 앞세워 소위 ‘빅뱅이론’에 입각한 전격적인 가격자유화조치를 1992년 1월 2일자로 단행하였다.
이 결과 각종 생필품 가격이 수십%에서 수천%까지 폭등했다. 반면 소련의 해체로 인해 각종 사회보장 혜택 등은 제대로 가동되지 못했다. 여기다 환율마저 급등해 서민들의 고통은 극에 달했다. 이것은 당연히 할 개혁이었지만 그 속도가 너무 빨랐다는 비난이 잇달았다. 국영기업 등의 개혁과 사적부문의 성장 없이 그냥 상황을 폭발시켜 그 고통을 국민들에게 전가해 버렸다는 전문가들의 반발도 잇달았다. 급진개혁파들은 러시아 의회 내 보수주의자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왔고 이들과 대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옐친과 행정부 그리고 루슬란 하스블라토프 및 알렉산드르 루츠코이와 최고회의간의 대립이 개혁파와 보수파의 대립이라는 형태로 계속됐다. 이 과정에서 보수파에 애국 민족주의 세력이 연합하였다. 또 온건중도파들도 급진개혁에 반대해 역시 옐친 반대파와 약한 연결고리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이념과 지향점이 달랐음에도 급진개혁에 반대한다는 명분으로 옐친의 반대진영 결속이라는 큰 틀의 연합을 형성하여 강력한 압박을 행사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옐친은 자신이 추구하는 개혁과 제도로서의 민주주의 완성을 위해 철저하게 과거 체제를 깨뜨리는 방식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러시아 최고회의에서 개혁안을 거부하면 그는 대통령 포고령으로 이에 맞섰다. 이런 식의 대립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러시아에서는 되는 일도, 안 되는 일도 없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 1993년 10월 혁명
여름 내내 지속된 정부와 의회 간의 첨예한 대립으로 인해 국가 전체가 거의 마비 상태로까지 치달았다. 두 권력 간의 적대 상태는 헌법적인 방법으로는 이미 해결이 불가능하였다. 옐친은 극단적인 상황에서처럼 정치적 교착상태에서 탈출하기 위해 비헌법적인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 해 여름에 최고회의는 정부가 제안한 모든 입법안을 기각했고, 민영화 조처에 관한 대통령령을 정지시켰으며, 대중매체를 입법부의 감독 아래 두는 법안을 만들었다. 옐친 대통령은 정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국민의 의사를 직접 묻기로 하고 국회의원을 새로 선출하겠다고 선포하였다. 마침내 최고회의는 독자적으로 9월 21일 밤에 루츠코이 부통령을 러시아연방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옐친은 독립국가연합 대통령들과 회담을 갖고, 국가 위기 탈출을 모색하였다. 9월 27일~28일 경찰 병력과 모스크바 수비대는 국회의사당을 봉쇄하기 시작했다. 10월 1일 국회 측 대표들과 협상이 시작되어 봉쇄는 완화되었다. 이틀동안 계속된 협상은 교착 상태에 이르렀고, 10월 3일에 최고회의측은 옐친을 대통령직에서 퇴임시키고 국가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단호한 행동들을 취하였다.
10월 4일 정부군은 국회의사당을 포위하고 탱크를 동원해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날 저녁 국회의사당이 점령되었고 하스블라토프와 구츠코이 등 최고회의 지도부와 무장 세력은 체포되었다. 국내정치세력간의 유혈 충돌로 150명가량이 사망한 이 비극적 사건에 대한 정치 사회 각계의 시각과 평가는 다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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