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문화의 융성과 국제성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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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문화의 융성과 국제성을 중심으로

당나라 전기는 국력이 강성하고 정치가 안정되었으며 경제와 문화가 모두 비교적 발달하여 당시의 세계사상에 선도적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조선업과 항해업의 진보는 더욱 해외 여러 나라와의 교류를 촉진시켰다. 당과 아시아 각국간의 관계는 밀접해지고 경제.문화의 교류는 전례 없는 성황을 이루었다. 장안과 낙양은 각국 교류의 중심이 되었고 그들 간의 상호 보충과 흡수는 세계 문명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나라에 들어온 서방문화는 중국의 전통문화와 융화되어 국제적이며 귀족적인 문화의 꽃을 피웠고 이는 중국에만 머물지 않고 다시 동아시아 각국으로 퍼져나가 신라일본발해월남 등의 문화발전에 자극을 주면서 동아시아 문화권을 완성 하였다.
한편 서역문화의 유입과 함께 중국문화의 서역전파도 활발히 추진되었다.
중국문화의 서역진출의 전진기지는 타림분지로 이 지역은 漢代이래 중국인의 진출로 문화저파가 진행되고 남북조시대에 중국의 식민국가로 번창한 고창국(高昌國:투르판) 주변에서는 중국의 의식주를 비롯하여 관혼상제의 풍습이 유행하였다.
당대 중국문화의 서방전파에서 문화상 큰 영향을 준 것은 제지법의 전파이다. 이는 고선지(高仙芝) 장군이 탈라스전투(751)에 패하면서 많은 당(唐)의 군인이 포로가 되었고, 이 가운데 제지기술자(製紙技術者)가 있어 이들이 사마르칸드로 보내져 아랍세계 최초의 제지 공장이 세워졌고, 사마르칸드의 종이가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당과 이슬람(大食國)제국의 정식접촉은 高宗代에 이슬람제국의 3대 칼리프(후계자) 오르만이 사신을 파견하여 朝貢을 바친 데서 시작되었다(651). 그러나 당과 아랍세계와의 교역은 처음부터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못하였다. 이슬람제국의 중앙아시아 진출에 두려움을 느낀 이 지역의 도시국가들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당과 이슬람의 동서 양대 세력은 무력충돌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은 則天武后와 韋后시대를 거쳐 玄宗이 등극하면서 적극적으로 서역경영을 추진하게 되었다. 신라인인 安西절도사 고선지(高仙芝) 장군을 파견하여 탈라스(Talas)강가에서 이슬람제국의 대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751). 이 전투에서 고선지 장군의 唐軍은 패하여 중앙아시아지역을 이슬람제국이 제패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당나라 군사의 포로 가운데 제지법 기술자가 있어서 製紙法이 아랍세계에 전파되고 그 후 유럽으로 건너갔다. 한편 중앙아시아 지방에서 돌궐세력이 후퇴하자 이에 대신하여 회흘(回:위그루)이 나타나게 되었다. 동서교섭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는 오르콘 碑文은 돌궐 可汗의 공적비이다. 이와 같은 중앙아시아 지방의 정치적 변화과정에서 새로 활약한 민족이 소그트지방에서 활약한 이란계 소그트인이다. 동서의 교역은 때로는 정치·군사적 원인으로 두절되기도 하였지만 이러한 때에도 중앙아시아 지방 상인의 활동으로 문물교류는 중단됨이 없이 전개되었다. 일찍이 전한의 장건이 漢武帝에게 올린 보고서에도 중앙아시아 여러 종족의 뛰어난 상업술을 말하고 있다.

1)신라와의 관계
신라는 한반도를 통일한 후 당과 장기간 동안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경제.문화의 교류를 더욱 빈번히 하였다. 신라의 금,은,우황,인삼,조하주 등 특산물이 대량으로 당에 수입되었다. 당의 수출품에는 사주,차잎,자기,약제,서적 등이 있었는데, 동시에 당의 정치.경제 제도와 문화도 신라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신라의 도성인 평양은 당의 양경에 있는 궁전과 성방을 모방하여 축조되었다. 신라의 중앙과 지방 관제,토지제도,부역제도,과거제도 등도 대체로 당제를 참조하였다. 당의 문화를 배우기 위하여 신라는 또한 대규모의 유학생을 장안에 파견하여 학습시켰다. 그러나 다시 돌아간 자는 백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 중 어떤 이는 중국에 장기간 거주하면서 지사과 고시에 참가하였으니 이들을 ‘빈공진사’라고 하였다. 고대 한반도에는 문자가 없었으므로 매우 일찍부터 한문을 채용하였다. 7세기 때 신라인들은 중국의 자음을 근거로 ‘이두’를 만들어 한문을 열독하는 데 편의를 도모하였으나, 정식 공문이나 국사의 기록에는 한문을 채용하였다. 따라서 당대의 문서가 대량으로 신라에 수입되었으며, 그 외에 천문,역법,불경 내지 의상, 복식도 양국의 문화교류에 따라 신라에 전파되었다.
당대에는 또한 적지 않은 고구려인.신라인들이 중국에 거주하고 있었다. 연해 지역의 성시에는 신라인들이 모여 살던 ‘신라방’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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