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와 친일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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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누구를 위한 친일인명사전인가?
친일파하면 떠오르는 것이 아주 나쁜 놈이다. 그렇게 교육을 받아왔고 당연하다고 느끼고 있다. 친일파가 나쁜 놈이라는 데에는 논란이 없다. 모두가 동의한다. 하지만 친일인명사전은 다르다. 누가 어떤 친일 행적을 했었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이것이 지금에서야 만들어지고, 논란이 아직까지 이어졌을까? 왠지 모르게 친일파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에 나는 굉장히 식상하게 느꼈다. 나쁜 놈인 것으로 결론이 날걸 왜 계속 논쟁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하지만 해방전후사에 대해 공부하면서 이 문제가 단순히 TV채널 돌리는 것과 같은 대상이 아님을 깨달았다. 우리 사회에 아직까지 영향을 끼치는 대상이 되었다. 최근에 나온 친일인명사전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1) 이영훈 교수는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의 역사인식은 낡았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는 “해방 후 친일파를 하루라도 더 빨리 청산하는 것이 새로운 국가 건설에 요구되는 필수 과제라고 생각했지만 세월이 60년도 더 지난 오늘날에까지 세가지 전제가 타당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뉴데일리, “친일인명사전 역사인식 낡았다-이영훈 서울대 교수 자유기업원기고“, 2008.05.17, 12:09:10, (http://www.newdaily.co.kr/_ezarticle/?im=artView&artid=2461053800)
2) ‘친일파 문제는, 오늘날 그 당사자들과 직접적인 피해자들이 거의 생존하지 않거나 노년기에 접어들어서 그 문제를 처음 다룰 때와는 시대적 상황이 달라졌고 요구 또한 달라졌기 때문에, 이제는 분명 다른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광복 직후였다면 일제 잔재 청산이 법률적인 처단이나 정치적인 해결책이 모색되었어야만 했을 터이나, 오늘의 친일파 문제는 오히려 역사적인 청산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사실 물리적으로 제재를 받을 대상이 생존하지 않는 상태에서 친일파 문제는 어디까지나 역사적인 청산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친일문제에 대한 관용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이 문제를 현실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실현가능한 방안이며 또한 역사적 진실에 접근하여 민족사를 재정립하고 나아가 민족통일을 위한 화해와 일치의 기틀을 마련해 보려는 고민스런 모색이기도 하다 편찬위원회 제 1차 국민공청회기조발제문, “친일파의 개념과 범주”, 이만열
1)은 뉴라이트 역사교과서 집필에 참여했던 이영훈 교수의 기고문 중에서 부분을 인용한 것이고 2)는 친일인명사전편찬위의 위원장의 글의 일부분을 인용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쉽게 말해서 이 인명사전을 ‘촌스럽다’고 하고 다른 일각에서는 ‘청소’라고 한다. 이념적인 스펙트럼에서 보자면 1)은 우파적 논리이고 2)는 좌파적 논리이다. 나는 ‘누구를 위한’ 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봤을 때 좌파적 시각을 동의한다. ‘누구’도대체 누구일까? 바로 우리다. 우리 부모님도 아니고 바로 지금 우리 세대를 위한 사전이다. 왜 우리를 위한 사전인지에 대해서 먼저 일제공권력의 하녀였던 친일경찰과 ‘문화스타’ 이광수의 변절을 보면서 친일파의 행태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일제공권력의 하녀와 문화 스타의 변절
‘민중의 지팡이’의 친일
일본이 해산시킨 대한제국의 군대가 8천여명밖에 안되는 게 비해 연 참가인원수가 8만여명이나 되는 의병의 전국적 저항을 진압하지 못하거나, 경찰권과 사법권을 장악한 통감부의 감시와 탄압 아래서도 걷잡을 수 없이 퍼져가는 애국계몽운동을 막지 않고는 한반도의 완전 강점은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따라서 일본은 이같은 저항운동을 탄압하고 강점정책을 수행해나기 위해 악명높은 헌병경찰제도를 실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강만길, 『20세기 우리역사), 창비, 파주, 1999, p.33.,
일제 강점기 때의 경찰은 현재와 같이 단순히 치안을 목적으로 존재하기 보다는 지배적인 목적이 그 존재 이유였다. 일제의 지배체제의 확립을 위해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곳에 공권력을 둠으로써 공적인 제재를 사적인 영역에서 강화시켰다. 1910년대 이 시대를 무단통치의 시기라고 한다. 한일합방 후에 전국에서 합방을 반대하는 의병활동이 활발해 지면서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 경찰과 군대를 더 늘렸다. 정확한 통계를 들어 헌병·경찰기관의 구체적인 숫자를 보면 다음과 같다. 1910년에는 전국의 헌병기관이 653개소였고, 그 인원이 2019명이었으나, 1911년에는 935개소 7749명으로 인원은 3배 증가했다. 경찰기관은 1910년에 481개소에 5881명이었으나, 1911년에는 678개소에 6222명으로 증가했다. 위의 책, p.33.
이처럼 한층 더 강화되는 공권력 속에서 조선인도 가담하게 되었다. 내가 조사한 실제 친일 경찰은 5명이다. 전봉덕, 최연, 노주봉, 최경진, 김덕기라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왜 친일을 하게 되었을까? 이들 중에 신분이 높은 사람도 있고,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도 있다. 어째서 이들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 도구였던 경찰에 들어가게 되었을까?
1910년 12월 12일 평안북도 강서에서 담양에서 태어났다. 7세가 되던 1917년 평양 서문외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으며 아울러 신학문을 배울 결심을 하였다고 한다.······또 전통적인 한학 공부만으로는 빠르게 변하는 시대적 흐름을 쫓아갈 수 없으며 앞으로의 장래도 보장할 수 없다고 생각한 듯하다. ······10세가 되던 1920년 4월에 새로 세워진 평양고등보통학교 부속 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이어 1926년 4월에 서울로 올라와 경성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1931년 4월에는 다시 경성사범학교 연습과에 입학하였다가 1932년 졸업하였다.········전봉덕의 보통학교 교원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1937년 4월 경성제대 법문학부 법학과에 들어감.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아 사법과에 합격하였다. 전봉덕이 본격적으로 일제의 관료로서의 길을 가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1940년 3월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같은 해 4월에 총독부 내무국 지방과에서 도행정계고등관견습생활을 시작하였다 ( 전봉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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