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대부흥운동에 대한 성격 규정과 해석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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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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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907년 대부흥운동에 대한 성격 규정과 해석 문제
1907년 대부흥운동에 대한 성격 규정과 해석 문제
Ⅰ. 서론
Ⅱ. 본론
1) 부흥회의 동기
2) 부흥운동의 원인과 배경
3) 부흥운동의 경과
4) 비정치화 교회 신앙과 민족적 기독교
5) 부흥운동의 교회사적 평가
6) 1907년 대부흥운동이 신앙 형태에 미친 영향
Ⅲ. 결론
* 참고문헌
Ι. 서론
1907년의 대부흥운동의 기원은 1903년에 있었던 감리교 선교사 하디(R.A.HARDIE)의 간증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1906년 연합집회에서 뉴욕의 존슨(Howard A. Johnson)목사가 영국의 웨일즈에서 열린 놀라운 부흥운동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실질적으로 영국이나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들은 1907년 부흥운동을 웨일즈 부흥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보고 있다. D. M. 로이드 죤스,「성령세례」정원태 역(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 1986), p.268
1907년의 부흥운동의 절정은 그해 1월에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부흥집회에서였다. 이 집회의 강사는 길선주 목사였다. 이 부흥회의 첫날에 참석하였던 정익로 장로는 아래와 같이 술회하였다. “그날 밤 길선주 목사의 얼굴은 위엄과 능력이 가득 찬 얼굴이었고, 순결과 성결로 불붙는 얼굴이었다. 그는 길 목사가 아니고 예수님이었다. ... 하나님이 나를 불러 놓은 것으로만 생각되었다. 전에 경험하지 못한 죄에 대한 굉장한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였다. 어떻게 하면 이 죄를 떨쳐 버릴 수 있고 도피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마음이 너무 괴로워 예배당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전보다 더 극심한 근심에 쌓인 얼굴과 죽음에 떠는 영을 가지고 예배당으로 되돌아 와서 ‘오! 하나님 나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라고 울부짖었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회, 「한국기독교의 역사Ⅰ」(서울: 기독교문사, 1989), p270에서 재인용
이러한 부흥의 열기는 집회가 계속되는 동안 더해갔다. 선교사 리(G.Lee)가 강단에 올라가 “나의 아버지여!라는 말을 하자 마자 밖으로부터 밀어 닦치는 강대한 힘에 압도 당하는”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였다.
1월 15일 부흥회의 마지막 날에 있었던 일이었다. 이 자리에서 길선주는 “자신은 형제들을 질시했을 뿐만이 아니라 특히 방위량(W.N.Blair)선교사를 극도로 미워했음을 회개한다고 하며 보기에도 비참할 정도로 땅바닥에 굴렀다. 길진경,「영계 길선주」(서울: 종로서적, 1980),p183~197
길선주의 뒤를 따라서 신자들은 자기들의 모든 죄를 내어놓고 통회하며 회개하였다.
민경배 교수는 이 1907년의 부흥운동을 한국 교회의 신앙의 형태가 형성된 사건이라고 보고 있다. “한국 교회의 신앙형태가 여기서 실질적으로 규정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시인한다.” 한국 교회사학 연구원「한국기독교사상」(연세대학교 출판부 1998) p261
감리교회의 존스 박사는 “이 위대한 사건으로 해서 한국 민족교회의 정신적인 역사가 출발하였고, 그 나름대로의 남다른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순수한 신앙적인 차원에서만 바라볼 수 있을까?
근세 역사에서 볼 때 1900년대의 한국의 정치, 사회는 국제정세의 희비가 그대로 축소 반영된 때이다. 1894~1895년에 일어났던 청일전쟁의 영향으로 국가는 위약체였으며 1904~1905년에 발발되었던 일로전쟁으로 말미암아 국민은 위기의식에 사로잡혔고 국가는 풍전등화격으로 위태로웠다.
일 ·로 전쟁의 전말을 간단히 살펴보면 임오군란에 민비가 시해된 후 고종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하여 있게 되자 중국은 한국에서 물러나게 되고 러시아와 일본이 한국에서 상호세력다툼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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