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종교사] 조선 교회의 아버지 , 길선주 영계 길선주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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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종교사] 조선 교회의 아버지 , 길선주 영계 길선주의 생애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조선 교회의 아버지 : 길선주
영계 길선주의 생애
들어가는 말
영계 길선주(靈溪 吉善宙, 1869-1935)는 한국장로교의 최초의 목사이며, 3·1운동의 민족 대표 33인중의 한 사람이고,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주역이기도 하다. 그는 한국교회에서 ‘조선 교회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로 20세기 한국교회사의 중요한 인물이다.
본문에서는 길선주의 생애에 있어서 성장과정의 측면으로 접근하여 그의 사상에 끼쳤던 영향에 집중하고자 한다.
당시 시대적 배경
19세기 조선의 역사는 한마디로 비운의 역사였다. 백여 년 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이후 조선의 역사는 일련의 전쟁으로 얼룩진 역사였다. 특히 19세기의 마지막 20년은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고비를 넘기던 때였으며 격변하는 과도기였다. 이 20년 동안 한국은 “은둔의 나라”에서 "열강의 각축장“으로 변했다. 이 기간에 한반도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임오군란(壬午軍亂, 1882),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 기독교의 전래(傳來 1884), 동학농민운동(1894)과 이어 청일전쟁(淸日戰爭, 1894-1895), 곧 이어 명성황후 시해사건(弑害事件, 1895)이 벌어진다.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1904년 러일전쟁(1904-1905)이 반발했다.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서울 : 대한기독교출판사, 1982), 205-208.
그래서 한반도, 특히 길선주가 활동했던 평양지역은 전쟁터로 변한다.
길선주의 생애 - 성장 배경
길선주는 길재 선생의 19대손으로 1869년(고종6년) 3월 15일 평남 안주성내 후장동에서 몰락한 양반계층인 무관 길봉순(吉鳳順)과 노복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윤열(潤悅, 도호(道號)는 영계(靈溪)이다. 그의 집안은 어려서부터 아주 가난했다. 네 살 때부터 가정에서 어머니로부터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고 일곱 살이 되면서 그는 서당에 나가 당시 유명한 정(鄭)선생의 문하에 들어가서 한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혼(早婚)이 성행한 당시의 풍습에 따라 열한 살 때 같은 성내(成內)에 신선달 협씨의 열여섯 살 되는 신성행 양과 결혼했다. 길선주의 가정은 의식주에 대한 예의범절과 규율, 상하에 대한 예절, 남여의 유별, 주종의 구별, 상전과 노복의 격차가 짜인 특유한 가풍이 있었고, 이에 따른 가정교육을 받으며 자녀들이 자라났다. 그러나 길선주는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을 만큼 엄격하였으나, 온화하고 덕성과 자애를 두루 갖춘 어머니의 교훈과 감화를 받음으로써 장래에 민주주의를 가정에 끌어들이는 준비교육을 받는바 되었다. 길진경, 『영계 길선주』, (서울 : 종로서적, 1980), 18-21.
12살 때 이미 십지부동의 영상(十指不動衣箱)이란 한시를 지어 장원급제하고 부사의 통리가 되었다. 1882년 길선주가 14세 때 부친은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6세 때 안주 노강첨사(老江僉使)로 부임했다. 그는 1882년 12월에 초인(招引)직을 사면하고 부친을 따라서 장 선생에게 한학을 계속 수학하였다. 길선주는 이 곳 사숙에서 계속 한학을 수학하면서 차츰 인생 문제에 대해서도 눈뜨게 되었다. 더구나 부친이 기생첩을 둠으로써 어머니가 받은 고통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세상을 비관하기도 했다. 기독교사학연구소,『교회사대사전Ⅰ』, (서울 : 기독교지혜사, 1994), 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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