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 읽는 기독교 이야기- 효율, 평등, 생명의 경제학 - 기독교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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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인문학으로 읽는 기독교 이야기- 효율, 평등, 생명의 경제학
기독교와 문화 / 독서보고
[인문학으로 읽는 기독교 이야기- 효율, 평등, 생명의 경제학]의 저자는 현대의 기독교가 비인간화를 초래하는 자본주의 효율성과 한국의 가족주의 결합이 가져온 물질적 경제 지상주의에 의해 종교적 초월성에 기초한 비판 세력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그것을 자본주의에 친화된 종교라고 직설적으로 현재 한국 기독교의 치부를 드러냈다. 책에 나온 대로 쉽게 예시로 말하면 헌금의 질은 헌금의 양으로 치부되어지고, 교회는 세속적 이익을 추구하는 타산적인 욕구 체계 또는 경제 조직과 개인의 삶 사이에서 삐걱거리는 순응 결핍 증세를 무난하게 잠재우려는 그저 치유 기능의 담당 기관으로 전락한 모습들이다. 그러면서 한국 기독교가 다시 예전과 같이 초월적 가치의 토대를 두기 위해서는 스스로에 내재되어있고 한국 사회 전반에 퍼진 경제주의라는 우상을 파괴해야한다고 말했다.
사회로부터 그리고 우리 내면으로까지 깊게 뿌리를 박은 경제주의, 자본주의 사상에 대해 자연스럽게 나타난 옹호적 반응을 어떻게 파괴할 수 있을까? 파괴할 수는 있는 것일까? 파괴할 수 있다면 왜 그렇고, 파괴할 수 없다면 왜 그런 걸까? 파괴할 수 있는 길은 정말 없는 것일까? 나는 우리가 이 책을 읽고 궁극적으로 도달해야하는 것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변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우선 그 답변을 하기 전에 「효율, 평등, 생명의 경제학」 을 기반을 두고 「희년과 민주주의 회복」을 사이사이 넣어 내용 정리를 했다.
「효율, 평등, 생명의 경제학」에서 기독교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평등 기반의 경제 이론, 한국 기독교의 경제윤리 핵심은 청지기 사상이라고 말한다. 세상과 그 속의 물질은 자신이 소유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잠시 맡기신 것을 관리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런 청지기 사상에는 인간의 평등성과 사회적 약자 보호에 대한 옹호가 담겨 있는 것이라 말했다. 이런 예수 운동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평등의 세계인 것이라고 하면서. 어떤 목사는 성서는 소유권보다 생존권을 우선시하는 것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얘기는 성서에 나온 약자 보호법에 확연하게 드러난다고 말했다. 이 책의 저자는 약자 보호법 중 8개의 법을 설명했다. 나는 이 법들 중에서 십일조법과 안식일법, 안식년법, 희년법을 살펴볼 생각이다.
저자에 말에 따르면 십일조법은 사실상 인간의 생명을 보고하는 사회세의 성격을 가졌다고 한다. 즉, 소득의 십 분의 일을 거두는 것을 경제적 약자들을 위해 사용되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느 순간부턴가 교회 재산의 증식 수단으로 악용되었다고 말한다. 왜일까? 결국엔 이것도 오늘날의 자본주의 체제로 일어난 아주 당연한 현상들 중 하나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보다는 돈을 더 중요시하는 이 비극적인 사회상 말이다.
안식일법과 안식년법은 안식일이 7일을 단위로 안식년은 7년을 단위로 하는 생명 보호법이다. 안식년은 그 보호가 자연에게까지 확장된다. 이 둘의 법은 돈이 아니라 생명을 보는 것이 성서의 관점이라는 것을 잘 설명해주는 법이다. 하지만, 이것도 지금의 시대에선 7일을 단위로든 7년을 단위든 잘 보장되지 않고 있다. 이것도 왜일까. 십일조법이 악용이 활성화 되어버린 이유가 같다고 생각했다.
다음, 희년법은 토지개혁법이고 사회개혁법이라며 저자가 설명했다. 땅뿐만 아니라 인간관계도 동등하고 평등하게 돌아가야 한다는 법이다. 즉, 한마디로 모든 것의 자유를 선포하는 법이다. 이것은 소작농이나 노예, 가난하고 빚진 사람들과 같이 상대적인 약자들에게 좋은 법안이었다. 이 법안은 그들에게 구원이나 다름없었다. 이것을 오늘날의 주빌리 은행의 탄생과 함께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주빌리 은행은 부당하게 사람을 노예화하는 금융의 무책임성과 위험성을 인식하여 알리기 위해 태어났으며 오늘날의 채권시장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국민들이 채권자의 신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도록 돕는 운동이다. 국내에서도 주빌리 은행이 들어와 신용불량자를 도와준 사례가 있었다. 신용불량자의 채권을 대신 값아 준 것이다. 또한 주빌리 2000운동이라고 이건 국가와 국가 간에 벌어진 것인데, 제 1세계(유럽, 미국)에게 빚을 진 아프리카의 빚을 모두 탕감해준 일이었다. 즉, 희년법에 토대가 된 약자의 구원이 주빌리 은행에도 녹아 있음을 알 수 있다. 희년법은 오늘날 탄생한 다른 방법을 통해 조금이나마 적용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약자 보호법들은 소유권보다 생존권이 더 우선시 된다는 원칙을 보여준다. 하지만, 약자 보호법 중 오늘날 제대로 지켜지는 것은 없다. 현대에 주빌리 은행이란 기구가 생겨나야 할 정도라면 왜 지켜지지 않는지에 대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작자는 평등과 정의의 문제는 단지 인간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을 포함한 포괄적인 생명문제라 말했다. 미래엔 생명의 가치 또한 경제 원리에 반영 되어야한다는 생태정의 개념을 설명했다. 결국 이것 또한 기독교에서 초월적 가치의 토대를 가지기 위한 평등사상에 대한 한 가지를 더 얘기한 것 같았다.
「희년과 민주주의 회복」에서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까지 확장시켜 얘기하면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위기는 노예처럼 강압적 노동에 시달려가면서 간신히 생존을 유지하는 국민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데 있다며, 돈 숭배가 막연하고 시장권력이 절대적인 위치에 선 우리 사회에 대해 비판적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정부는 국민 모두가 대한민국이 생산한 부의 분배에 참여할 수 있는 경제 민주화를 위해 시장지배와 경제력 남용을 적극 막아야할 의무가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면서 50년마다 채무자들의 빚을 일괄 탕감해주고 잃었던 토지를 다시 되찾아주는 희년을 선포한 구약성경에 근거한 청년부채탕감운동을 한국 교회 일부에서 추진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두 권의 책 속에서는 평등과 공동체를 위한 변화를 만들고자 했던 기독교의 경제 체제나 운동들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 속은 지배층들만이 모든 걸 가지고 있고 시장경제 체제의 부조리함을 표현하면서 기독교의 경제체제와는 대조적인 양상을 여감없이 보여준다. 그러면서 기독교는 이런 현실로 인해 부정적으로 변모해왔다면서 말했다. 그 이유에는 정말 오직 자본주의를 우상적으로 생각하는 우리들이 평등과 자유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봤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직설적으로 얘기하면 이 책의 주 독자들은 기독교인들이니,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말씀에 쓰인 대로 하느님이 추구하시던 바른 길로 되돌아가자. 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제일 알맞은 정답이 아닐까. 무교 인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나는 하느님이 추구하시고 말씀하시던 길로 되돌아가자 라고 생각되기보단, 물질만능주의의 이 세계에 반해 올바른 경제 체계를 말해주는 것에 긍정하며 끄덕이며 읽은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얼마나 많이 이들이 이 사회에 물질 만능주의, 자본주의가 깊게 물들었다고 생각하게 되어 이런 책이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결국 이런 책이 나왔다는 데는 공감을 얻기 위함이 아닌가.
우리 사회가 예전에도 이랬는가? 로 생각해보면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이정도로 비인간화된 사회는 예전엔 없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사람들 간의 불평등함과 빈부격차 수는 점점 더 늘어만 가고 있다. 사실 지금의 나는 이 책들이 출간한 년도보다 독서보고를 쓰고 있는 현재가 더 심각해 졌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