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 Heiler의 Prayer에서 본 신비주의 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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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F. Heiler의 Prayer에서 본 신비주의 역사관
1. 신비주의에서의 역사관
신비주의자가 그의 황홀경에서 온전히 하나가 되는 정적인 신은 시공간을 초월해 있으면서 이 세상과 역사와는 아무 필요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역사에서 신의 계시라는 개념은 신비주의에서는 상당히 생소한 것이다. 그것은 순전한 초역사적 종교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신비주의는 필로 필로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종교철학자이다. 원 이름은 필론이다. 그의 활동 시기가 예수와 동시대였다. 대체로 필로의 철학사상은 히브리 사상과 희랍사상, 그리고 동방의 밀의 종교의 여러 가지 요소가 적절히 절충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근본과제는 창조신을 희랍철학, 특히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가지고 해석하였다. 신은 세계 창조자이지만 초월자이기 때문에 ‘로고스’를 통해서 세계를 창조하고 질서를 확립하였다고 보았다. 바로 이 로고스 사상이 필로의 유일한 철학 사상으로 되어 있다. 『그리스도교 대사전』대한기독교서회 p.1127
의 신비주의와 이슬람의 수피즘 수피즘은 막연하게 신비주의로 알려져 있다. 페르시아 에르펀과 이슬람 수피즘은 둘 다 한국에서 신비주의로 번역되어 쓰이고 있다. 이슬람 수피즘은 페르시아 에르펀에서 생겨났으며, 에르펀의 기원은 조로아스터교, 불교, 신플라톤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수피즘은 신을 인식한다는 의미로서 영감과 직관으로 사물의 진리를 얻는다는 점에서 에르펀의 한 종파이지만, 행위론에 토대를 둔다. 에르펀은 이슬람 도래 이후 수피즘의 형태로 나타났다. 신규섭, 『페르시아 문화』살림 p.59-60.
처럼 불가피하게 신의 역사적 계시를 재해석하고, 구속사를 신비적 체험을 위한 단순한 수단으로 그 단계를 내린다. 성서 역사에서 역사적 사실들은 초현세적 진리들의 투명한 상징들로 변해간다. 그것들은 정신적 상태로 변하고, 현세의 외적 과정에서 경건한 영혼의 깊이로 이동한다. 어거스틴은 그의 Enchridion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서, 무덤에서, 삼일 후 부활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우편에 있는 중에 일어난 일이 무엇이든지, 이것들에 의해서 기독인 신앙의 삶이 신비적 단어들이 아닌 극적인 행위들로 상징적으로 출발하게 되는데, 여기에 있는 모든 것은 이뤄진 일이다.”라고 말한다. 어거스틴의 사상에 자극받은 중세 신비주의는 신사적이고 정제된 구세주 신비주의를 무르익게 하였는데, 이것의 사상과 분위기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성경적 그림들, 즉 그의 출생과 어린 시절, 그의 수난과 죽음 등에 관심을 기울인다. 신비적으로 재조명된 예수의 인간적 이미지는 예수의 신비적 모방을 위한 모델이 되었다.
예수의 가난에 찌들린 삶, 그의 정적주의, 겸손의 수동적 미덕, 사랑과 순종은 신비주의자들의 삶에서 발견되는 것들이다. 그러나 버나드 시대로부터 중세와 특히 프란시스코의 경건의 이상에 대해 그것의 특징들을 빌려오게 되는 그리스도를 모방함은 근본적으로 구원의 신비적 과정을 묘사하는 것이고, 성경적 그림들 속에 안주함을 중지하는 신비적 과정의 산물이다. 그것은 준비 과정이며, 구원 여정의 높은 단계를 수반하는 정결의 방법이다. 그러나 신비주의에 의해 새롭게 조형된 신약의 예수에 대한 그림은 신비적 명상의 소재로써 여전히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그것과 함께 완전한 삶의 다음 단계가 시작된다. 헌신이라는 신비적 삶은 이 그림에서 나오는 강력한 감정적 자극들에 의해 양분을 얻는다. 감정적 자극에서 신비적 삶은 힘과 열정을 얻는다. 그러나 신비적 삶의 정점에 다다라서는 경건한 영혼은 구원자와 그의 열정에 대한 극도의 감정적인 이미지들을 거부하여야 하며, 독일의 신비주의자가 말한 것처럼 “이미지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최상의 선과 그것과의 온전한 합일을 이루는 영혼의 고상한 관상의 순간에서는 모든 인간적이고 역사적인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들은 사라진다. 알렉산드리아 신학 오리겐을 중심으로 알렉산드리아에서 발전한 신학.
으로 거슬러 올라 가서 “인간 그리스도를 통해서 신 그리스도에 도달할 수 있다.”라는 어거스틴의 원칙은 중세 신비주의자들에게서 반복된다. 그러므로 성육신한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는 영원하신 하나님 의지의 역사적 계시자가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하고, 무한한 신성의 감각적인 상징이다. 경건한 사람이 이 사실에 도달하려면, 그는 역사적 예수를 뛰어넘어야 하고, 자신을 모든 피조물들의 이미지와 그의 이미지로부터 벗어나게 해야 한다.
2. 예언적 종교의 역사관
신비주의에서 하나님은 스스로 안식하는 분이시며, 스스로 충만하신 분이시고, 침묵하시고, 감춰진 분(the deus absconditus)이시다. 예언적 종교에서 하나님은 창조자이시고, 일하시고, 말씀하시며, 당신의 뜻을 자연과 개인과 국가의 운명에 드러내시는 계시의 하나님(the deus revelatus)이시다. 역사는 그의 계시의 장소이며, 신과의 교제가 이뤄지는 곳이고, 모든 신앙의 확고한 기반이 되는 곳이다. 갈데아에서 데라 자손의 이주, 애굽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출애굽, 광야에서의 방랑생활, 가나안 정복, 이웃 족속들에 대한 승리 등은 여호와의 뜻이고 작품이라고 예언적 설교가 계속적으로 설파하는 것이다. 출애굽, 율법을 줌, 시내산에서 언약을 세움 등은 구약의 종교에서 미래에 대해서 모든 믿음과 소망이 굴종의 시기에 고수할 수 있게 하는 구속적 행위(redemtive deeds)들이다. 그러나 구약의 선지자들은 종교적인 관점에서 역사에 대한 좀 더 깊은 이해를 하고자 애썼다. 정복과 승리에서 뿐만이 아니라, 민족의 수난과 시련을 통해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배웠다. 이스라엘의 굴욕은 여호와의 공의의 심판이었고, 이방 왕들은 그의 도구들이었다. 제 2 이사야 Deutero-Isaiah, Second Isaiah라고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