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20장 4-6절 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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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요한계시록 20장 4-6절 주해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요한계시록 20:4-6 주해
4절
Κα εδον은 초점의 이동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즉 환상의 초점이 무저갱에서 하늘로 바뀌었다. 요한은 환상 속에서 보좌를 보게 되는데, 그 보좌에 앉아 있는 자들이 있다. 보좌에 앉은 자들이 누구냐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본문에서는 누가 보좌에 앉아 있는지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첫째로, 이십사 장로로 보는 의견이 있다. 요한계시록에서 보좌에 앉아 있다고 언급되는 인물들은 이십사 장로들이다(4:4; 11:16). 둘째로, 순교자로 보는 의견이 있다. 요한의 설명은 보좌에 앉은 자들을 순교자로 단정지을 근거가 될 수 있다. 셋째로, 성도로 보는 의견이 있다. 첫째 부활에는 성도들이 참여하기 때문에, 보좌에 앉은 자들을 특정한 무리로 한정 지을 수 없다는 견해다.
보좌에 앉아 있는 ‘그들에게 심판이 주어줬다’(κα κρμα δθη ατο). 본문은 마치 보좌에 앉아 있는 자들이 심판을 받는다고 오해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성경번역본마다 다양하게 번역되어 있다. KJV(King James Version)와 NAS(New American Standard)는 원문을 그대로 번역했고, NET(New English Translation)과 NIV(New International Vision)는 ’authority to judge’로 번역했다. 개역개정은 ‘심판하는 권세’, 공동번역은 ‘심판할 권한’, 표준새번역은 ‘심판할 권세’로 일관적으로 번역되어 있다. 앞에 기록된 사탄의 결박(20:1-3)은 하나님께서 주도하신 심판이다. 따라서 이 표현은 ‘그들을 위해 심판하셨다’로 번역해야 한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서술은 다니엘 7:22의 영향을 받은 듯 보인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을 위하여 원한을 풀어 주셨고”(개역개정).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실행하시는 이유는 성도들의 원한을 풀어주시기 위해서이다. 성도를 위한 하나님의 심판은 지혜서 3:7-8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을 위하여 원한을 풀어 주셨고 때가 이르매 성도들이 나라를 얻었더라”. 하지만, 이곳에서는 순교자들을 위해 심판을 시행하신다. 요한계시록에서 보좌는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되어 등장하며(4:5; 6:16; 8:3-5; 11:16-19; 16:17-18; 19:1-5; 20:11-12 등), 20:4-6에서는 하나님의 통치에 동참한다.
영혼(ψυχ)은 “살아 있는 육체”(8:9; 12:11; 16:3; 참조. 18:13)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목을 베였다고 했으므로 영혼과 육체를 구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혼은 목 베인 자의 육체를 의미하게 되고, 본문에 대한 몰이해로 이어진다. 이 영혼들은 죽음을 당한 후에 육체와 분리되어 하늘에 거하고 있다. 즉 이들은 여전히 중간상태에 있다. δι는 이 영혼들이 목 베임을 당한 이유를 알려준다. 이 영혼들이 죽음을 당한 이유는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다. τν μαρτυραν ησο는 “예수에 대한 증거” 또는 “예수에 의한 증거”로 해석될 수 있으며, 문맥상 “예수에 대한 증거”로 해석한다.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과 예수의 이름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고난 당하는 성도들의 신실함을 드러내준다(참조. 1:9; 6:9; 12:11, 17; 14:12). 이러한 죽음은 이들이 순교자들임을 밝혀준다. 동사 πελεκζω는 신약성경에서 이 구절에서만 사용되었다. 당시 로마법을 고려해보면, 모든 순교자들이 참수를 당하지는 않았으리라 여겨진다. 로마의 사법 관행은 범죄의 성격과 범죄자의 신분을 고려하여 판결을 내리므로, 순교자들의 참수는 상류층에 해당하는 판결이다. 그렇다면 순교자의 신분과 상관 없이 그들의 존재는 존귀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묵시적 환상에서 역사적 고증에 얽매여 해석할 필요는 없다. 이 구절은 6:9과 매우 흡사하다:”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κα οτινε ο προσεκνησαν τ θηρον οδ τν εκνα ατο κα οκ λαβον τ χραγμα π τ μτωπον κα π τν χερα ατν)이란 표현은 13:15-17에서 처음 사용되었고, 그 대상은 순교자를 가리킨다. 문법적인 문제로 인해 순교자들이 한 집단으로 존재하는지 아니면 개별적인 두 집단이 존재하지는 의문스럽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순교자라는 하나의 집단이다. 하지만 우리는 순교자들을 성도로 이해해야 한다. “성도들의 진”(20:9)이란 표현을 통해 순교자들이 모든 성도들을 대표하고 있다고 짐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천년왕국의 통치를 순교자로 한정 지어야 할 이유가 없다.
이 부분은 천년설 논쟁의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ζησαν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동사 ζω는 요한계시록에서 “부활한 상태”(1:18[x2]; 2:8; 13:14)와 “지속적으로 살아 있는 상태”(3:1; 4:9, 10; 7:2; 10:6; 15:7; 19:20)라는 의미로 사용되므로, 이 구절에서는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주의 깊게 파악해야 한다. KJV는 ‘lived’로, NAS와 NET, NIV는 ‘came to life’로 번역했다. 개정개정은 ‘살아서’, 공동번역과 표준새번역은 ‘살아나서’로 번역했다. 만약 부활한 상태를 의미한다면, 종말에 발생한 사건(an event at the end of history)이다. 5절에서 이 사건을 “첫째 부활”이라고 부르므로, 이 구절에서 ζησαν은 “부활한 상태”를 의미한다. 순교자들은 부활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 동안 왕 노릇 한다. Χριστ는 요한계시록에서 총 6번 사용되었다(1:1, 2, 5; 11:15; 12:10; 20:6). 3번은 ησο와 함께 사용되었고(1:1, 2, 5), 3번은 단독으로 사용되었다(11:15; 12:10; 20:6). 단독으로 사용될 경우에는 “기름부음 받은 자”, “메시아”라는 의미를 갖지만, 이 역시 예수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천 년 동안의 통치라는 사상은 후기 묵시적 유대주의의 종말론적 기대에서 유래한 듯 보인다. 유대인들은 메시아 왕국이 지상에서 영원히 지속된다고 믿어 왔었다(사 11:10-16; 65:20-25; 단 7:14, 27). 하지만 지상에서의 삶에 대한 염세주의의 증가로 이원론이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전부터 간직해왔던 종말론적 기대와 후기 초월적 우주적 왕국 개념을 중재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고,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 이전에 하나님 나라의 시간적 공간적 실재에 대한 인식이 나오게 된다.
요한의 환상기술은 시간적인 순서를 따르지 않고 있는데, 이러한 서술은 도치법(hysteron-proteron)에 의한 표현방식으로 보인다. 이러한 “서사적인 사건들의 논리적인 순서를 뒤바꾸는 기법을 사용하는 저자의 경향(3:3, 17; 5:5; 6:4; 10:4, 9; 22:14)과 어떤 개인 또는 집단을 묘사하기 전에 그들이 ‘어디에’ 앉아 있는지를 먼저 말하는 저자의 경향(4:2, 4; 14:14; 20:11)에서 기인한다.” 보좌에 앉은 인물들에 대한 묘사는 그들의 존귀함을 강조하기 위한 목적으로 여겨진다.
5절
요한은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천년 통치를 ”첫째 부활”( νστασι πρτη)이라고 칭한다. 만약 그리스도와 천년 동안 왕 노릇 하는 자들을 순교자들로 한정된다면, 나머지 성도들은 첫째 부활에서 제외되고 둘째 사망에 포함되게 된다(6절). 하지만 4절의 순교자들은 모든 성도들을 대표하므로, ‘나머지 죽은 자들’(ο λοιπο τν νεκρν)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죽은 자들을 가리킨다. 12, 13절에서는 이들을 죽은 자로 부른다. νστασι이란 단어는 오직 20:5, 6에서만 사용되는데, 두 경우 모두 “첫째 부활”로 사용되었다. “예수의 부활은 명사 νστασι가 아니라 동사 ζω로 표현되다(1:18).” 20:12-13은 둘째 부활로 여겨지지만, 요한계시록에서 둘째 부활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은 없다. 반대로 “둘째 사망”(2:11; 20:6, 14; 21:8)은 말하지만, “첫째 사망”은 말하지 않는다(6절). 어쩌면 “첫째 사망”에 대한 언급이 없는 이유가, 성도의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반면에 불신자들은 심판의 날까지 죽은 상태로 있다(13절). 랍비 문헌에서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에 대한 단서는 발견되지 않는다(Str-B, 3:828). 요한복음 5:29에서 이와 유사한 표현이 발견된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하지만 이 표현은 “한 번의 부활 속에서의 두 측면, 즉 의인들의 운명과 악인들의 운명을 가리킨다”.
삽입구(parenthesis)는 나머지 죽은 자들에 대한 설명이다. 이 삽입구는 최종편집 단계에서 첨가된 주해로 여겨지며, 이 구절의 삽입으로 문맥의 흐름이 부자연스러워졌다.
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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