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에 대한 오해와 고구려 교육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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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구려에 대한 오해와 고구려 교육의 이해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중국은 이미 지린성 지안 지역에 있는 고구려의 벽화고분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았고 지금은 백두산마저 ‘장바이산’으로 부르며 자기네 것으로 만들기 위해 국제적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에 대비한 북한과 우리의 대응은 미비하기 짝이 없다. 북한은 북한 소재의 고구려 벽화 고분을 중국과 공동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기는 하였으나 중국의 역사왜곡에 관해서는 중국과의 마찰을 꺼려 별다른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 정부도 북한 지역에 대한 영토관할권이 없는 관계로 적극적인 대응을 하는 데 한계를 느끼고 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역사, 문화, 외교적 대응책을 탄탄하게 마련해 두는 것이다. 다양한 분야에 걸친 광범한 자료의 수집과 철저한 고증에 바탕을 둔 학문적 대비가 절실하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안타깝게도 고구려와 발해에 대한 우리의 학문적 업적이 중국에 비하여 너무 부족하고 미흡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중국은 동북공정이라는 국책사업을 2002년에 시작해 (공식적으로는) 2007년 1월 31일에 종료했지만, 그 사이 그들 정부의 전폭적 지원하에 수많은 업적들을 쏟아냈다. 그에 반하여 우리는 정부차원의 정책적 대응도 미흡하고 연구자도 부족하여 안타까운 상황이 크게 개선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쨌든 동북공정은 우리에게 자성의 기회를 주었다. 우리는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그에대한 충분한 연구를 하고 있는가. 국민들에게 올바로 알려주고 있는가. 중국의 정책에는 철저하게 대비하고 있는가 등의 질문을 던져보면 모두 미흡하게 생각된다.
그동안 고구려 연구재단을 중심으로 제법 괄목할 만한 양의 업적이 나온 편이기는 하나국민들이 그것을 접하고 소화할 겨를도 없이 재단은 새로 발족한 동북아시아역사재단으로 흡수된 상태이다. 예전에 비하여 많은 양의 업적이 나왔다고 해도 고구려를 종합적으로 다룬 간편하고 알찬 개설서 한 권조차도 우리는 아직 갖고 있지 못하다. 이러한 실정은 고구려의 역사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그 문화의 경우에는 더욱 심각하다. 이 때문에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지속되기 어렵고 , 이해가 깊어지기는 더욱 어렵다. 문제가 생길 때만 관심이 고조되었다가 곧 식어버리기 일쑤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고구려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막강했던 나라다. 그러나 그 사실이 오히려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에 관해 잘못된 인식을 자리 잡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즉 고구려는 군사력은 막강했으나 문화적으로는 다소 뒤진 무사적인 나라였으리라는 막연한 편견이 은연중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는 너무도 잘못된 생각이다. 고구려는 최강의 군사력을 지닌 동시에 독창적이고 진취적이며 복합적인 문화를 꽃피웠던 문화선진국으로서 백제, 신라, 가야, 일본 등 동시대 다른 나라에 큰 영향을 미쳤다. 더불어 고구려의 군사력 부분에만 집중되어 있어 교육적인 면은 가려져 있다. 위에서 고구려 역사와 문화에 대한 올바른 인식의 필요성을 언급하였는데, 여기서는 집중적으로 고구려의 교육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올바르게 이해해보자. 그리고 단순히 고구려가 무에만 강한, 문화적, 교육적으로 뒤떨어진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해보자.
2.고구려의 교육
“(영양왕) 십일년 봄 정월에 수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태학박사 이문진이 옛날 일들을 묶어 새로이 신집 다섯권을 만들었다. 나라를 처음 세울 때부터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어떤 사람이 백 권의 책을 써서 유기라고 이름 붙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그것을 고친 것이다. -[삼국사기]
위 자료를 통해 일찍이 고구려가 문자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유기]라는 사서를 백 권이나 쓸 정도로 문자를 쓰는 것에 능숙했음도 아울러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습자를 가르쳤을 고구려의 교육은 어떠하였을까?
지금까지 남아있는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에는 두종류의 교육기관이 있었다. 태학과 경당이 그것이다.
“(소수림왕)이 년 여름 유월에 진왕 부견이 사신과 부도 순도를 보내서 불상과 경문을 보냈다. 왕이 사신을 보내 답례하며 토산물을 바쳤다. 태학을 세워 자제들을 교육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