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의 역사 관비 교남 북한의 발해사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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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남북한의 역사 관비 교남 북한의 발해사 인식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한국사에 있어서 커다란 획을 긋는 중대한 사건으로서 한국전쟁을 들 수 있다. 45년 전 강대국들의 편의에 의해 무심코 그어졌던 한반도의 분단은 전쟁으로 인해 더욱 그 골이 깊어져 전쟁 발발 40년이 지난 지금에는 영토의 분단, 민족의 분단에 이어 마음의 분단으로까지 이어졌다. 한국전쟁의 기원은 1945년 이후부터 찾을 수 있다. 나라가 분단되고 난 뒤 서로 다른 체제에 따라 전체 민족사회를 건설하려는 요구는 남과 북에서 공통적으로 존재했다. 남한은 자본주의에 기초한 단독정부를 세우고 멸공통일, 북진통일을 주장했으며, 북한은 사회주의적 통일과 북한의 혁명기지화 노선 남한의 혁명을 위해 북조선은 혁명의 전초 기지로 만들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방 후 5년만에, 그리고 남북한에 각각 분단 정권이 성립된지 2년만에 일어난 한국전쟁은 민족통일을 표방한 전쟁이었으나 그 결과는 민족의 분열과 대립을 심화시키고 남북한에서의 분단체제를 한층 더 강화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것으로 인해 우리 남북한은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지고 지금까지 발전해 왔다. 서로 같은 한 민족이면서 이렇게 서로 다르게 발전되었다는 사실에서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도 서로 생각하고 느끼는 건 다르겠지만 우리 역사에 관한 견해는 거의 비슷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과연 그럴지 북한은 우리의 역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고 있으며, 우리와는 어떻게 다른지 이제부터 알아보기 위해 우리의 수많은 역사들 중 난 발해사를 꺼내어 이야기하고자 한다.
남북한의 발해사 연구는 민족사적 계승문제를 밝히는 부분에 상당한 비중이 두어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것을 모두 민족적 이해관계에 입각한 주관적 연구라고 매도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민족의 교류와 민족의 계승문제는 별개로 보아야 하고, 발해사에 대한 복원은 진실의 복원문제일 뿐이지, 타협의 산물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진실이 현실에서는 평화롭지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평화를 보는 잘못된 시각일 뿐, 그 진실의 복원작업은 결코 멈출 수 없다는 이야기다.

1. 발해사인식의 전제
한국사의 전개과정에서 각 시대의 발해관은 발해국을 자국사로 인식하고 있었는가의 여부와 발해의 종족적 계통을 고구려로 인식하고 있었는가의 여부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이 문제는 서로 동일한 문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다른 문제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발해를 자국사로 인식하면서도 발해의 종족적 계통에 있어서는 고구려와 다른 말갈로 보려는 기록들이 병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발해의 종족계통을 보여주는 중국 측의 기록들이 각각 그 내용상의 혼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발해의 건국자인 대조영의 출신을 언급하면서 발해의 멸망시기와 가장 가까운 시기에 편찬된 《구당서》(후진, 945)는 발해를 고구려 별종으로 그리고, 이보다 115년 늦게 나온 《신당서》(송, 1060)는 발해는 고구려와 다른 종족계통인 듯이 속말말갈인으로 고구려에 부속된 자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이 결국 후세인 들로 하여금 발해를 고구려인 들이세운 국가로 보기도 하고 마치 고구려인과 계통을 달리하는 말갈인 들이세운 국가로 보기도 한 원인이 되었으며, 한국사에서 발해의 자국사 논쟁이 벌어지게 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대조영의 본래 모습은 고구려의 속말(송화강) 지역사람이었다고 생각한
다. 또한, 발해사 인식을 살핌에 있어 또 하나 주목할 수 있는 사실은 발해에 대한 인식이 시대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발해에 대한 인식이 꼭 말갈의 문제만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의 반증이다. 다시 말해, 한국사에서 삼한(마한) 및 통일신라에 대한 정통의식의 농도와 시대마다의 북방관 이를테면 고토 회복 의식의 농도에 따라 발해사에 대한 자국 사로서의 인식 정도가 다르게 나타났던 면도 있었다는 점을 미리 밝혀두어야 할 것 같다. 따라서 전자의 경우는 발해를 고구려를 계승한 왕조로 인정하면서도 신라사의 한 인접국 정도로 기록하였다. 이러한 원인들로 인하여 각 시대마다의 발해사 인식은 항상 신라사 특히, 신라의 삼국통일관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다. 또한 후자의 경우는 발해를 고구려와 종족적 계통을 달리하는 말갈의 후손 왕조로 생각하면서도 한국사의 체계에 넣기도 하였다. 발해인들 은 그들이 고구려를 계승한 왕조라는 사실을 여러 군데에 남기고 있다. 특히, 일본과의 외교 문서에서 그들은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였고 부여의 풍속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였으며, 제 3대 문왕 대흠무는 그를 스스로 고구려 국왕이라고 하는 등 발해의 고구려 계승을 확실히 하였다. 신라인들도 발해의 고구려계승은 인정하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최치원의 예로 볼 때에 그는 발해를 고구려의 사마귀 만한 부락에서 나왔다고 하거나, 고구려의 남은 무리들이 모여 북쪽의 태백산을 의거하여 나라를 세운 것이라고 하여 발해의 고구려계승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그러함에도, 신라인들은 발해를 말갈발해이나 발해말갈 혹은 말갈 등으로 부르면서 발해라는 공식 국호는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발해말갈이란 당나라 사람들이 동북방의 이민족을 통칭해서 깔보아 기록했던 《구당서》의 것을 빌린 것이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발해를 과거 고구려시대 변방 주민들이 세운 나라였다고 낮추어 불렀던 호칭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말갈발해로 기록됨으로 해서 마치 고구려와 전혀 다른 종족인 말갈족의 발해라는 인식을 후세에 남기게 하였다. 이것은 당나라 사람들이 여기고 있던 중국 중심적인 시각과 신라인들의 왕조 중심적 시각이 어우러져 나타났던 잘못된 표현이었다고 생각한다. 한편, 신라인이 느꼈던 발해국에 대한 유대의식은 남북국(신라와 발해)이 삼국항쟁과 같은 치열한 교섭의 역사를 갖고 있지 않았고 대립의 현상 고착이 이루어지고 있었기에, 삼국시대보다도 더 낮은 유대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발해가 건국과 명망의 위기에서 신라에 우선적으로 도움을 청하였던 사실이나 신라가 이것을 수락한 점을 통해 볼 때, 남북국은 서로가 어느 정도의 역사적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도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남북국은 신라가 발해에 대한 약속을 파기하고 침략국 거란을 도와줌으로 해서 서로의 관계가 종결되고 말았다. 남북국이 200여년간 현상 고착적 대립관계를 지속해 왔던 사실과 발해가 이민족에게 멸망하였던 사실, 그리고 실질적인 면에서 신라를 계승하였던 고려 건국 등은 이후의 고려, 조선인들의 발해사 인식에 커다란 한계가 되었다.
2. 고려시대의 발해사 인식
한국사에서 발해에 대한 자국사 논쟁이 시작될 수 있는 시기는 고려부터이다. 발해가 이민족에 의해 멸망하고 민족사 상에 신라중심적이기기는 하였지만, 단일 왕조가 형성되었고, 그 이전의 삼국이나 남북국 어느 쪽도 민족사의 체계화나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일 왕조였던 고려가 건국되고 난 이후에는 고구려백제신라사를 묶어 《삼국사기》를 쓸 정도로 민족사에 대한 체계적 인식이 이루어졌다. 민족사 최초의 통일 왕조로서는 통일신라였다. 그 때에 이러한 역사서가 나올 법도 하였으나, 30년의 짧은 기간과 발해 건국으로 인한 남북국의 양국시대가 접어들면서 이러한 민족사의 체계적인 작업은 뒤로 미루어졌던 것이 아니었던가 한다. 고려시대 《삼국사기》가 한국사에서 최초로 우리 역사를 체계화시킨 대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발해사가 제외되었다. 그 이유가 삼국의 역사를 기록하는 《삼국사기》였기에 가야사나 발해사가 빠질 수밖에 없었다거나 자료가 없었다는 이해도 가능하나, 그 보다는 당시 고려 지성이 갖고 있던 역사 인식의 한계가 더 큰 이유가 아니었던가 한다. 그러함에도, 고려인들은 대체로 발해를 자국사로 인식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실례 중의 하나가 고려 태조가 발해를 친척의 나라로 인정하였다는 사실이다. 즉, 그는 거란을 무도한 나라로 지목하고 후진의 고조에게 함께 거란을 치자고 하는 등 적대시하였던 것은 친척의 나라인 발해를 멸망시켰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고려 태조는 발해 멸망 이전에는 거란과 그렇게 적대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발해가 멸망하고 난 이후부터는 거란에서 보내온 낙타 등을 만부교 다리 아래에서 굶어 죽이기까지 할 정도로 매우 적대적이 되었다. 이와 같은 이유는 과거 거란이 고려와 경쟁관계에 있던 후백제와 교섭을 하였던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겠으나, 친척의 나라에서 보는 바와 같은 발해와의 역사적 관계도 또한 작용하였다는 것은 자명하다. 고려 전기인 들이 발해를 자국사의 일부로 인식하였던 사실은 묘청의 일파로 지목되어 벼슬에서 사퇴하였던 윤언이의 해명 발언에서도 확인된다. 즉, 그는 자신이 건원(독자적 연호사용)하자는 청을 올린 것이 금나라를 격노하게 하여 사단을 만들고 그 틈을 타서 반역을 꾀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왕을 존중하는 정성에서 였다며 우리 역사의 예를 들어 자신을 변호하고 있다. 고려의 태조와 광종이 건원한 바 있었고 또한 과거의 문건을 보건대 신라와 발해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음을 들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연호 사용의 예를 신라와 아울러 발해를 들었던 점은 발해사를 자국사의 일부로 보았던 증거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예는 서희나 윤관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인들의 발해사는 신라사의 부수적인 존재에 불과하였다는 것이 한 특징이다. 따라서, 그들이 고려 초와 같이 고구려 계승의식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할지라도, 그들의 왕조 계승을 고구려→발해→고려로 생각하는 면도 희박하였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한계는 고려가 신라의 후삼국을 통일한 왕조였다는 사실과 발해와 신라가 200여년간 대립적이었다는 사실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고려는 40년 가까이 혼란상을 빚어오던 신라의 후삼국을 통일한 왕조였다. 말하자면, 여기서의 후삼국이란 고구려백제신라의 전 삼국에 대한 후삼국이 아니라, 남북국중의 하나였던 신라의 후삼국이다. 따라서 한국사의 발전 과정을 막연히, 삼국→남북국(신라와 발해)→후삼국→고려로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후삼국이 형성되어 통일되는 기간에도 북국의 발해가 926년까지 엄연히 존재하였고, 왕실이 망한 후에도 발해주민들의 역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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