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콴유 독서감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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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리콴유 독서감상문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사실 리콴유라는 인물을 처음 알게 된 건, 내가 대학교를 입학해서 중국어를 전공으로 공부를 시작했을 때였다. 중국의환경과 문화, 역사 등을 배우는중국 학개론 수업에서 중간고사 시험때문에공부를 했어야 했던 나라가 싱가포르인데, 우리 나라 못지 않게 작은 이 나라를 지금의 선진국으로까지 만들 수 있게 기반을 닦아 놓은 인물이 바로 리콴유였다. 나는 그가다른 정치가들과는 어떻게 다른 인물인지 알고 싶어졌고그로인해 교수님의 추천으로 접하게 된 리콴유 자서전이라는 책을 읽음으로써 그를 더 깊이 알 수 있게 되었다.
리콴유는 1923년 9월 16일 싱가포르의 어느 화교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일족은 중국에서 소수민족 취급을 받는 하카족 있었으며 리콴유는 그 화교이민자의 4대째 후손이었다. 어릴 때 부터 공부에 대한 열의가 높았던 거는 우수한 성적으로 영어계 교육기관인 텔록쿠나우 초등학교와 래플스 중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당시 싱가포르의 최고의 대학이었던 래플스 대학에 장학금을 받으며 입학하게 된다. 그런데 그가 래플스 대학에 재학중이던 1941년 12월,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 당시 영구으이 아시아지역 식민지 거점이었던 싱가포르에도 침략의 손길을 뻗치게 된다. 영구을 포함한 연합군은 예상밖의 고전을 겪다가 결국 일본군에게 싱가포르를 넘겨주게 되었고, 일본군은 싱가포르주민 5만여명(대부분 중국계 주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게 되는데, 중국계였던 리콴유는 아주 아슬아슬하게 학살현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일본군의 싱가포르 점령이 장기화된터라 리콴유도 본의 아니게 일본군 선전기관지를 발행하는 부서에서 연합군 측의 선전방송 내용을 감청하는 잡일을 하며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고, 암시장에서 브로커로 일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서 중고등학교와 대학 시절 자신의 최대 경쟁상대였던 걱추라는 아가씨와 친해지게 되고 결국 그녀와 결혼한다.
나중에 리콴유는 다니던 래플스 대학에 복학하지 않고, 그가 모아둔 돈을 털어서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유학생활을 하면서 그는 점차 민족문제, 인종차별 문제에 눈을 뜨게 되었는데 많은 경험과 공부를 하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사회주의에 대해선 다소간의 관심을 보이곤 했고, 나중에 그가 싱가포르 정치계에 입문했을때 유학시절의 경험을 살려 일하게 된다. 그는 영국에서 케임브리지 법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영국 변호사 시험에서 합격한 뒤 1950년 8월, 당당하게 고향 싱가포르로 돌아오게된다.
그가 변호사에서 정치인으로 발돋움 하게 된 건 당시 싱가포르의 현실은 혼란과 궁핍이 공존하는 어려운 사회였고 그는 변호사 일을 하면서도 현실사회를 바꿔볼 요량으로 차분히 준비를 하다가 결국 유학시절 알게된 동지들과 인민행동당을 창당하게 된다. 정치계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불합리한 영국 식민 지배체제에 대해 비판과 저항을 평화적인 수단으로 벌였고, 또한 여러 노종조합의 법률고문으로 일하면서 노종관계사건등을 주로 수임하던 터라 그는 중국계 중하류계층의 밑바닥 인심을 얻을 수 있었다.
그가 싱가포르 자치령의 총리자리에 취임하던 당시 그는 35세의 젊은 나이였다. 영국시민 정부의 관료로 일한 경험이 있는 몇몇 정치적 동지들과는 달리 리콴유 그 자신은 그때까지도 별다른 행정경험이 없었다. 허나 일본근 점령시절과 영국유학시절에 겪은 체험, 특히 영국의 앞선 정치,사회제도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차근차근 싱가포르 전체를 개혁하는 정책을 펼치게 된다.
그가 집권한뒤 가장 먼저 펼친 정책은 정부재정의 건전화였다. 고위 공부원들의 봉급을 자신삭감해가면서 재정적자를 흑자로 반전시키려고 노력했으며, 당시 무주택자가 대부분을 차지하였던 현실을 감안하여 주택개발청을 설립하고 일종의 영구임대아파트를 대량으로 건설하여 서민층의 생활을 안정시키려 노력하였다.
그 어느 정치인들 못지않게 의욕적으로 저책을 추진하던 리콴유를 막아선 것들은 바로 다름아닌 공산주의자들 이었는데, 그들은 상투적인 전술이었던 폭력혁명은 물론이거니와 선거에서의 승리를 통한 합법적 정권탈취, 공산화도 획책하고 있었다.
리콴유는 처음에 그들을 묵인, 방조해 주는듯 했으나 나중에 공산주의와 정면으로 맞서 싸울만한 힘이 생기게 된자 그들과 전면전을 선포하게 된다. 인민행동당 내에 있던 공산주의자들은 집단으로 탈당하여 ‘바리산 사회주의 연합’ 이란 정당을 세우고 리콴유에게 조직적으로 저항하려고 했다. 허나, 리콴유 집권후 그가 보여준 국민들을 위한 노력들이 진실했던 덕분에 대다수의 싱가포르인들은 과격무식한 공산주의자들을 자연스레 외면하게 되고 결국 공산주의자들은 1960년대말 이후로 싱가포르에서 거의 사라지게 된다.
서울시만한 좁으 땅에, 변변한 자원은 커녕 마실 물조차 부족한 싱가포르가 독자적으로 생존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생각한 리콴유는 국민들을 설득하여 곧 영국에서 독립할 예정인 이웃나라 말레이 반도와의 합병을 추진하게 된다. 공산주의자들의 방해책동 등 많은 우여곡절 끝에 1963년 싱가포르가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자마자 사라와크, 사바와 함께 말레이시아 연방을 결정하게 되었다. 허나,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이 어느 정도 나마 사라지자 이번엔 중국계말레이계간의 인종갈등 문제가 이슈화 되었다. 싱가포르만 따지고 본다면 중국계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지만 말레이시아 연방 전체를 놓고 볼때는 말레이계가 다수를 차지했다. 정치적, 군사적 실권도 말레이계가 차지하고 있었던 반면, 경제권은 부유한 중국계 화교가 차지하고 있었기에 두 인종간의 갈등이 극심했다.
게다가, 민족감정을 부추겨 유권자들의 표를 얻으려는 말레이 반도 본토의극단적인 정치세력의 책동때문에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 주(州) 사이에는 감정싸움이 빈번하게 일어났고, 심지어는 아예 대놓고 싱가포르를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축출해야 한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말레이 이들도 점차 늘어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결국 1964년 7월 21일, 예언자 모하메드의 생일(이슬람교의 경축일중 하나) 을 맞이하여 싱가포르내의 이슬람계 말레이인들이 인종폭동을 일으켰고, 1964년 9월에도 또 한차례 폭동을 일으켜서 각각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참상이 빚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