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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콴유 자서전 독후감
오늘날 싱가포르는 아시아에서 가장 선진화된 국가 중 하나다. 그러나 그 시작은 척박하고 미개한 동남아의 작은 도시국가에 불과했다. 싱가포르 건립의 아버지 리콴유 전 총리는 젊은 세대에 독립과 선진국 진입의 힘들었던 과정을 알리기 위해 자서전을 저술하게 됐다고 한다. 그들이 자원도 없고 살벌한 민족주의로 무장한 동남아 신생국들 틈에 끼여 생존에 애쓰던 작고 미약한 싱가포르의 과거는 모른 채 40년 만에 선진국으로 올라선 현재를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저서는 국가의 중대사인 대통령 선거을 앞두고 있는 한국인에게도 좋은 참고가 될 만한 훌륭한 지도자의 통찰력과 혜안이 담긴 책이라고 생각한다. "제비는 작아도 오장육부를 다 갖고 있다" 그가 자주 인용하는 중국 속담이라고 한다. 나라 크기의 크고 작음을 떠나 국가 경영의 기본은 매한가지라는 지론을 담은 이야기다. 그는 타고난 현실감각과 정확한 판단력으로 대중적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통해 국민과 호흡했고 그 결과 아시아에서 가장 정직하고 유능한 정부, 공공질서와 안보가 보장되는 사회를 이룩했다. 그를 통해 국가뿐만 아니라 기업 발전에 있어서 리더의 지도력과 세계관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또 영국에 있는 법대에 진학하기 위해 어려서부터 영어 학교에 다니고 영국 케임브리지 법대를 졸업하는 등 모태인 중국 문화와 중국어를 등한시한 것에 대한 솔직한 자성의 마음을 표현했다. 그는 정치계에 뛰어든 후 모국어를 영어만큼 잘 구사하지 못하는 것을 많이 후회했다고 한다. 그래서 세 자녀 모두를 중국어를 사용하는 학교에 보냄으로써 다민족 국가에서 융합도 중요하지만 자국의 문화와 언어를 유지 계승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몸소 실천하며 싱가포르 국민들에게 본보기가 됐다. 이 저서전은 바다의 등대처럼 회사 경영. 더 나가서는 필자 개인의 인생 항로에도 많은 지침을 주었다.
리콴유(李光曜)는 1923년 9월 16일 싱가포르의 어느 화교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일족은 중국에서 소수민족 취급을 받는 하카(客家)족 이었으며 리콴유는 그 화교이민자의 4대째 후손이었다. 그가 태어났을 당시만 하더라도 그의 집안은 부유했었으나 세계 경제대공황으로 인하여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된 뒤부터는 평범한 중산층 정도로 몰락했다. 하지만, 공부에 대한 열의가 높았던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영어계 교육기관인 텔록쿠나우 초등학교와 래플스 중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당시 싱가포르 최고의 대학이었던 래플스 대학에 장학금을 받으며 입학하게 된다.
그런데, 그가 래플스 대학에 재학중이던 1941년 12월,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당시 영국의 아시아 지역 식민지 거점이었던 싱가포르에도 침략의 손길을 뻗치게 된다. 영국을 포함한 연합군은 예상밖의 고전을 겪다가 결국 일본군에게 싱가포르를 넘겨주게 되었고, 일본군은 싱가포르 주민 5만여 명--대부분 중국계 주민들을 대상--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게 되는데, 중국계였던 리콴유는 아주 아슬아슬하게 학살현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일본군의 싱가포르 점령이 장기화 된 터라 리콴유도 본의 아니게 일본군 선전기관지를 발행하는 부서에서 연합군 측의 선전방송 내용을 감청하는 잡일을 하며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고, 암시장에서 브로커로 일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서 중고등학교와 대학 시절 자신의 최대 경쟁상대였던 콰 걱추[Kwa Geok Choo]라는 아가씨와 친해지게 된다. (나중에 그녀와 결혼)
1945년 8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고 쫓겨났던 영국군이 다시 싱가포르에 들어오게 되었으나 공산주의자의 난동 등으로 인하여 싱가포르는 전쟁이 일어나기 이전과 같은 평화가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리콴유는 전쟁 전까지 다니던 래플스 대학에 복학하지 않고 그간 모아둔 돈을 털어서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게된다. 처음에는 LSE(런던정경대학), 나중에는 케임브리지 대학 법대(트리니티 칼리지) 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점차 민족문제, 인종차별문제에도 눈을 뜨게 되었다.( 원래 그는 영국에 유학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철저한 영국문화 신봉자였고
심지어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중국어대신 영어만 사용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유학생활 중 만난 일부 영국인들에게 인종차별을 경험하면서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많은 경험과 공부를 하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다소간의 관심을 보이곤 했고, 나중에 그가 싱가포르 정치계에 입문했을 때 유학시절의 겸험을 살려 일하게 된다. 또한 유학시절 싱가포르 출신의 유학생들인 고켕쉬[Goh Keng Swee], 용 풍하우[Yong Pung How],케니 번[Kenny Bun],토 친츠에[Toh Chin Chye]등과 사귀며, 정치를 주제로 토론을 벌이기도 하고 싱가포르의 장래를 걱정하면서도 미래에 대한 꿈을 키워갔다.(이들은 나중에 싱가포르의 리콴유 총리내각에서 중요한 직책을 담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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