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여행 레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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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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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로마제국은 바야흐로 전 세계 최강국이 되어있었다. 로마가 엄청난 세력을 확장하자, 스스로 좀 더 고귀하고 웅장한 모습을 갖출 필요가 있다고 느낀 로마인들은 오래전부터 선조들의 땅이었다고 믿고 있었던 그리스로 시선을 돌리게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트로이의 영웅 아이니우스가 로마의 성스러운 강인 티버강 입구로 들어와 로마문명을 일으켰다고 전해지고 있다. 줄리우스 시져도 아이니우스의 아들인 아키가니우스의 직계 후손임을 자처 했다. 아드리안 황제는 그리스 문명에 심취한 나머지,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에 봉헌하는 것을 일생의 최대 영광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를 찾았던 수많은 로마인들이 왜 그토록 그리스 유산에 매혹되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이 천 년 전 위대한 지리학자이자 역사가였던 포세이우니스가 그 빛나는 지식으로 우리를 역사로의 순례여행으로 안내해줄 것이다.
그리스로 여행을 떠난 사람들은 아키아 도로를 이용해 로마로 떠났을 것이다. 현대인의 눈엔 거칠게만 보이지만, 당시에는 보수와 유지를 담당하는 특정 공공기관이 있어 늘 매끄럽게 잘 관리되던 도로였다. 사실 로마에는 제국 전체를 거미줄처럼 이어주는 12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복잡한 도로망이 있었고 이는 로마가 전 세계를 정복하는데 일조하고 있었다. 남부 이탈리아의 그렌디제 섬, 여행객들은 그리스로 건너가기 위해 배를 타고 위험한 여행을 하기도 했다.
엄청난 숫자의 로마 배들의 잔해가 발견된 것은 그 항해가 얼마나 위험했는가를 잘 말해준다. 오네라이나라 알려진 배를 탄 승객들은 그들의 계급에 따라 각기 다른 등급의 객실에 배치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화물차나 항아리 심지어 서커스 동물들과 함께 일종의 화물칸을 이용해야 했다. 때로 선장은 그리스로 가는 직항로를 이용하는 대신 지금의 알바니아인 발로니아를 경유하는 더 짧은 항로를 택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곳에서 더 작은 배로 계속 항해하곤 했는데, 작은 배는 속도가 더 느리고 해안에 더 가까이 머물곤 했다. 배는 코르푸와 세펠로냐를 경유한 다음 선조들의 땅인 코린트 만에 도착할 때까지 항해를 계속 했다. 코린트는 본토의 펠로폰네소스까지 이어지는 지협과 인접한 도시였다.
오늘날에는 이 지협을 통과하는 현대적인 운하가 이오니아 해와 에게 해를 연결해 준다. 그러나 고대 여행객들과 상인들은 한 바다에서 다음 바다로 가는 지름길을 스스로 알아내야 했다. 포장용 돌에 남긴 표식들은 수세기 동안 이륜전차들이 이 길을 따라 다녔다는 것을 보여준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이 도로는 실재로 포장된 도로였으며 굴입대를 이용해 지협은 건너갈 배들을 운송하는데 쓰였다다는 것이다.
선원들과 화물들은 이런 식으로 펠로폰네소스 반도 전체에서 320km 가량의 먼 길을 올 수 있었다. 고대 해운계의 문제점에 대한 실로 독창적인 해법이 아닐 수 없다. 코린트의 찬란했던 고대 문명은 로마의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발란이 일어나 도시가 완전히 파괴되었던 기원전 146년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기원전 44년 줄리어스 시져는 로마양식으로 도시를 재건했는데, 온갖 사치와 안락함으로 치장했으며, 나아가 교역과 운송의 요충지로 까지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쓰인 비명들이 발되었던 덕분에 우리도 코린트가 매우 생동감 있는 국제도시였으며 호머가 정의한대로 가장 화려한 도시였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다양한 고고학적 학파들에 의해 수세기동안 이루어진 발굴과 해독 작업이 이러한 새로운 뒷받침 한다. 레키온 항구에 나있는 거의 600m에 이르는 레키오라는 도로가 도시에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이 대로 양옆에는 고전적인 코린트식 문자가 아로새겨진 수백 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 웅장한 주황이 늘어서져 있다. 레키오 끝부분에는 프로필로 움이라 알려진 세 개의 아치들이 서있었다. 이 아치들은 아고라 즉, 집회장으로 이어졌다. 이 광장은 제국에서도 가장 크고 화려한 광장의 하나로 가로 195m, 세로 98m에 달했다. 이곳은 오늘날에도 세계에서 가장 큰 고대 집회장으로 알려져 있다. 광장주변에는 아름답게 장식된 건축물들이 있다. 그 중 가장 눈에 띠는 것은 죄수들의 형상이 그려진 것이다. 이곳이 그 건축물의 잔해인데, 기둥을 장식하고 있는 죄수들의 조각에서 그 이름을 딴 것으로 지금 지역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로마인들에게 생포된 전사들은 무시무시한 파르티아인들로 최후까지 이곳에서 싸워 이름을 남긴 것이다. 이 광장의 상업적인 면을 보면, 수백 개의 상점들과 작업장들이 온갖 종류들의 상품을 팔기 위해 빽빽이 들어서 있었는데, 특히 붉은색과 검은색의 특이한 대비로 유명한 코린트 스타일의 도자기 같은 전형적인 그리스 제품들이 팔렸다고 한다.
중요한 공공건물들 역시 광장을 굽어보는 형태로 세워졌고 당시 도시의 행정을 관장했으며 오늘날의 시장에 해당하는 두 명의 행정 장관들, 즉 둥비르의 사무실도 이곳에 있었다. 이곳에서 코린트식 문자를 장안해내는 당시 채석공들의 숙련된 조각술도 볼 수 있는데, 오늘날로 치면 일종의 아르누보 19~20세기 유럽, 미국 각지에서 일제히 유행한 새로운 예술을 뜻하는 장식 양식. 유연한 곡선과 곡면이 특징이다.
스타일인 현대적인 꽃무늬를 볼 수 있다.
아름다운 공연장은 광장의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사업상 협상과 재판 등 공정 기능이 필요한 일들을 처리했다. 코린트에는 다양한 종교가 있었는데, 이 사원들도 그때 지어진 것들 이었다. 신들에게는 각자에게 바쳐진 판테온, 즉 신전들이 있었다. 비너스와 헤라클레스 넵튠과 아폴로 그리고 머큐리 신을 위한 신전들이었다. 광장은 또 행정관계자들이 시민과 교류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다양한 언어와 종교적 배경을 가진 연사들은 네이마라 불리는 대리석 연단에 오르곤 했는데, 연단은 특히 모임을 주관하거나 공공 연설을 하는데 사용되곤 했다. 성바오로는 서기 1세기에 바로 이 자리에서 자신의 신앙심을 간증하는 코르티아 시민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연설을 했다고 한다. 어쩌면 코린트를 수도로 삼고 있던 이 그리스 지방의 로마인 최고 행정관이던 프로큰슨 갈리우스도 지켜보았을지도 모른다. 이곳에서는 기독교가 만연하고 있었으며 성바오로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개종하기도 했다. 고대 코린트에는 다른 유적들도 많았는데 지금은 현대도시의 건설로 모두 묻혀버리고 말았다. 중세 아크로 코린트라 불리던 언덕위에 세워진 이 군사 요새 주변을 발굴했을 때 고고학자들은 수많은 고대 건축물의 잔해를 발견했다고 한다. 이 건물은 이곳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소위 신성한 매춘 즉, 히어로가미를 위한 장소로 추정된다, 히어로둘스라 불리던 100명 이상의 비너스의 여 사제들이 이곳에서 살았다. 그들은 코린트에 오는 모든 남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라며 대단히 비싼 가격으로 흥정 했는데 그럼에도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코린트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최소한 파충류의 위협을 받지는 않은 것 같은 사람이 기다란 뱀이 휘감긴 지팡이를 든 신비로운 조각상이 발견되었다. 뱀은 예술가의 상상만은 아니었다. 고고학자들은 고대예술에서 모든 표식이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사실 이 에스크레이피우스 또는 로마어로 에스큘라피우스는 양 국민 모두에게 약의 신으로 통했다. 오늘날에도 휘감은 뱀의 모양은 제약과 병원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에스클레이피우스를 숭배하는 사상은 신이 태어났다는 고대 그리스의 대도시 유피도르스에서 시작되었던 것이었다. 그 신을 모신 사원은 치유의 장소였는데, 그 안에서는 사실상 죽음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 신의 형상이 발견된 장소를 계속 발굴하는 동안 플로스라 알려진 이 이상한 모양의 원형 건축물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 건물은 기둥과 문자 상인 방식 구조와 온갖 장식물들로 둘러싸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