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돌 유적 기행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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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인돌 유적 기행문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에 성행하여 초기철기시대까지 존속한 거석문화의 일종이며, 고대국가 발생 직전의 사회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인돌은 지역에 다라 호칭이 다른데, 한국과 일본에서는 지석묘, 중국에서는 석봉, 구라파 등지에서는 돌멘 등의 명칭을 사요하고 있습니다.
고인돌 제작과정은 쓸만한 돌을 캐냅니다. 그 돌을 통나무를 이용하여 옮깁니다. 받침돌을 세운 다음 흙을 돋웁니다. 그 다음에는 덮개돌을 얹고 흙을 치웁니다.
고인돌의 종류는 많이 있지만, 두가지를 소개하면 탁자식 고인돌과 기반식 고인돌이 있습니다.
먼저 탁자식 고인돌에 대해 소개하겠습니다. 탁자식 고인돌은 잘 다듬어진 대형 판돌 3매 또는 4매로 ‘ㄷ’자나 ‘ㅁ’자로 짜 맞춘 무덤방을 지상에 축조하고 그 위에 편평하고 거대한 판석상의 덮개돌을 얹어놓은 것으로 탁자나 책상모양 형태입니다. 이는 요녕지방과 북한지역에 많이 보이는 형태이어서 북방식이라고도 한다. 북한에서는 발굴지역의 명을 따라 오덕형이라 하며, 중국에서는 석붕(石棚)이라 부릅니다. 탁자식 중 길이가 8m 이상이고 폭이 5m 이상, 높이 2m 이상인 초대형급의 고인돌은 요동반도와 한국의 대동강유역에서만 나타나고 구릉이나 산중턱에 1기씩만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 다음에는 기반식 고인돌에 대해 소개하겠습니다. 기반식 고인돌은 판돌을 세우거나 깬돌, 자연석으로 쌓은 석실을 지하에 만들고 그 주위에 받침돌을 4개에서 8개 정도 놓고 그 위에 커다란 덮개돌로 덮어 마치 바둑판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를 남방식이라고도 부르며 기반식 고인돌 중 덮개돌이 거대하고 괴석상을 한 대형의 고인돌들은 호남과 영남지방에서만 보이고 뚜렷한 석실이 없는 것이 많습니다. 규모가 큰 기반식 고인돌은 산기슭이나 구릉, 계곡 끝 평지에서 1기씩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나, 고인돌이 군집을 이루고 있는 곳에서는 군집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거나 얼마간 떨어져 독립적인 위치에 있다. 이러한 고인돌은 대개 길이가 3~6m, 두께도 2~4m에 속한 덮개돌이 달걀처럼 동그란 형태와 각 면들이 반듯하게 잘려져 있어 직육면체의 외형을 하고 있습니다.
한반도 고인돌의 생성에 대해서는 한반도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자생설, 유럽 또는 동남아시아의 고인돌이 해양을 따라 전파되었다는 남방기원설, 시베리아나 만주지방에서 내려왔다는 북방기원설이 있습니다.
고인돌의 기능은 바위는 영원하다는 믿음에서 세워진 고인돌은 대부분 무덤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고인돌이 모두 무덤으로 쓰인 것은 아닙니다. 특히 유럽에서는 하나의 큰 선돌을 세우거나 여러 개의 입석을 대지 위에 둥그랗게 돌려 세웠습니다. 둥글게 둘려 세운 입석을 환상열석이라고 합니다. 유럽인들은 환상열석 유적지에서 종료 의식을 행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고창 고인돌 박물관 인근 도산리에 잇는 탁자식 고인돌은 그 규모와 모양으로 보아 제단이나 신앙의 대상물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고인돌의 철학은 고인돌의 모양은 음양론을 바탕으로 두고 있습니다. 뚜껑돌은 양으로 하늘(아버지)을 상징하여 1개이고, 받침돌은 음으로 땅(어머니)을 상징하여 2개로 이루어졌습니다. 뚜껑돌, 받침돌, 피장자는 각기 천, 지, 인을 상징하여 삼재 사상을 나타납니다. 고인돌에도 신교의 천치 음양과 삼신사사이 녹아 있는 것입니다.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는 전라북도 익산군 금마면에 있는 고인돌을 구경하고 나서 “지석이란 것이 세속에 전하기를 옛날 성인이 고여 놓은 것이라고 하는데 과연 신기한 기술로 이상하다.”라고 동국이상국집에 소감을 적어 놓으셨습니다. 19세기 말에는 한국을 여행하던 외교관과 선교사들이 슨 고인돌에 대한 기록도 전해 오고 있습니다.
비래동 고인돌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저희가 맨 처음에 답사를 갔다 온 곳입니다. 선사시대 청동기 유적이며 1997년 11월 7일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33호 지정되었습니다. 옆에 사진은 저희가 답사를 갔을 때, 찍은 고인돌 사진입니다.
비래동 고인돌 발굴은 경부고속도로 회덕-증약간 확장공사에 따른 구제발굴의 일환으로 1997년 4∼6월 충남대학교박물관에 의해 조사되었습니다. 유적은 비래동의 계곡 사면 퇴적층과 이 곳에서 이어지는 구릉(해발 128m) 정상부에 있다. 발굴 조사된 유적은 총 3기의 지석묘입니다.
1호 고인돌은 덮개돌의 절반부가 서 있어 입석처럼 보이며 1963년 새마을운동 당시 동네 주민들이 덮개돌 표면에 새마을 기를 그려 넣었다고 합니다.